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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녹색평론과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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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3-07-10 19:49 조회3,2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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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김종철 선생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발행이 중단되었던 ‘녹색평론’이 계간지로 변모해 돌아왔다. 1991년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문을 연 ‘녹색평론’은 우리의 지성사에 그리고 실천적 담론의 장에 놀라운 분수령이 되었다. 

황규관 시인

황규관 시인

돌아보면 여러모로 의미심장한데, 현실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이 무너지던 시기와 ‘녹색평론’이 창간되던 시기가 겹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현실 사회주의가 해체의 길로 들어서자 혁명의 포기가 발 빠르게 진행되었고,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이 우리를 덮쳤던 게 지난 시간의 솔직한 모습이다. 

선생은 어느 사석에서 1990년대 우리의 정신은 적잖게 병든 상태였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공통의 꿈이 사라진 상태에서 자라나는 개인의 욕망이 건강할 리 없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그 회색의 시간 속에서 ‘녹색평론’이 울려준 맑은 경종은 우리에게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경종이 우리 현실을 다른 경로로 ‘제대로’ 안내했는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말이다. 

하지만 ‘녹색평론’은 새로운 샘물의 역할을 충실히 했으며, 그 샘물 주위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 것도 부정 못할 사실이다. 사람에 따라서 그 샘물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을 축였는지에 대해 묻는 일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녹색평론’의 잘못만이 아니다. 마을의 우물이 폐쇄되는 것과 동시에 생수가, 플라스틱 통에 담겨서, 도시 곳곳으로 배달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플라스틱 통에 담긴 생수가 마을의 우물에 덮개를 얹은 것이고, ‘녹색평론’이라는 샘물로 가는 발걸음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김종철의 뜻깊은 유산 ‘녹색평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이 작은 샘물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더욱 정직한 목소리로 목마른 이들을 초대했고 응답한 이들을 환대했다. 사실 선생에 대한 세간의 속된 불만들은 배달되는 생수에 이미 길들여졌기 때문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일단 나 자신이 1990년대를 그렇게 살았다. 

김종철 선생의 급작스러운 타계로 인한 ‘녹색평론’의 중단은 점점 더 심해지는 ‘타는 목마름’들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탁월한 향도의 부재는 한동안 많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향도의 열정을 겉핥기로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10년’을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 탓도 컸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향도의 돌올함에 너무 크게 의지했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아무도 예상치 못한 선생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과 마음의 산발은 쉬 수습되지 않았다. 그래서 ‘녹색평론’은 당분간 침묵을 택했던 것이리라. 

돌이켜 보면, 선생의 죽음은 (사람이 태어나면 누구나 죽는다는 운명론이 아니라) 예견돼 있었던 것 같다. 가까이 있다고 자처하던 그 누구도 선생의 육체적 고통을 알지 못했다. 

젊은 동무들에게 보낸 마지막 메시지가 평생 소음을 싫어해서 소음에게 형벌을 받고 있다는 것인데, 다르게 말하면 고요가 아니라 소음을 더욱 증폭시켜 온 현실의 문턱을 끝내 넘어서지 못했단 말도 된다. 내가 알기로 선생은 그만큼 정직했고, 그래서 예민했다. 그 예민함은 정직을 잃지 않으려는 실존의 고투였음이 분명하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 2020년 6월25일 새벽, 선생은 자신을 괴롭히는 소음을 좀 달래보려고 했는지 손전등을 들고 자신이 사랑하는 나무들에게 갔다가 그 속에서 숨을 거뒀다. 평소에 나뭇가지 하나라도 건드리면 참지 못했는데, 나무에게 마지막을 의탁하려 했던 것일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온갖 상징이 선생의 죽음 전후를 뒤덮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보통 유언이라고 부르는 마지막 말은 남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어떻게 일구고 무엇을 뿌릴 건가 

그런데 선생이 남기고 간 뜻깊은 유산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녹색평론’이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해서 가장 무서운 바이러스는 인간의 ‘탐욕’이라는 말로 끝난 선생의 지난 30년이 우리 앞에 남아 있는 것이다. 선생이 부재한 ‘녹색평론’은 여전히 낯설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녹색평론’은 우리의 공유지(公有地)다. 땅을 잃은 민중은 민중이 아니라는 게 내가 이해한 선생의 마음이었고. 다름 아닌 선생의 시(詩)였다. 나는 선생에게서 시도 이런 공유지에서 난다는 것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이제 ‘녹색평론’이라는 공유지는 우리의 책임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다. 어떻게 일구고 무엇을 뿌릴 것인가에 ‘앞으로 30년’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황규관 시인

경향신문 6월 12일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612030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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