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병직]단순한 세계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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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4-04-01 18:51 조회1,83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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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에 심취했다. 윤리적 문제에 고민하던 중 선악의 이분법을 내세운 마니의 종교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그러다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를 만나 은유의 세계에 눈을 뜨고, 어머니의 소원대로 기독교로 개종했다. 마니교는 궁극의 진리와 거리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악이란 선의 결핍일 뿐 그 자체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필요한 선의 요소가 부족할 때 악으로 보인다. 반면 보이지 않는 선도 요소를 보완하는 다른 것들과 어울려 조화를 이루면, 악에 가리웠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나의 양상이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를 사악한 것으로 단정했다. 하느님의 품 바깥에서는 완전한 선에 다다를 수 없다는 원리적 한계에 갇혀 모순을 드러내고 말았는데, 그런 아우구스티누스의 태도는 소설 속의 소년보다 못해 보인다.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에서 파이는, 진실을 내세우는 것이라면 여러 종교를 한꺼번에 믿는 일이 왜 허용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절대적 범죄 개념이 없듯, 절대적 선이나 악 역시 없다고 말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식화된 윤리 의식이 아무 말이나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 이전에 도덕과 윤리는 사회의 필요조건이지만, 현대인들에게 윤리가 경쟁의 도구처럼 사용될 때는 부작용을 야기한다. 모든 일을 선 아니면 악으로 분류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당위와 선택의 상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선택을 마치 당위인 것처럼 내세움으로써 정당화하려 한다.
선과 악은 보통사람들의 능력으로 판단이 가능해야 한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각자는 선을 선택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너무나 흔하게 타인의 선택과 충돌한다. 모든 개별 상황을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만 있다면, 충돌은 해결이 가능하다. 그 구분을 누구도 명확히 할 수 없다는 현실이 다소 불가사의하다. 그것은 윤리학이 파악할 수 없는 복잡성 때문일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그가 귀의한 신도 복잡계로서의 인간 사회를 예견하지 못했다.
사회 구성원 전원이 철학자나 과학자가 될 수는 없다. 철학이나 과학 역시 복잡성을 보여 줄 수는 있어도 해결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단순한 방식을 선호하고, 매번 결정에서 자기의 선을 주장한다. 얽히고설킨 복잡한 상황은 거의 모든 결정이 선으로 연결되도록 여러 경로로 논리의 틈을 제공한다. 세상은 선한 결정으로만 이루어지는 듯한 착각 속에서, 결과는 혼돈에 가까워진다.
현대의 개인이나 집단은 단순한 선악 논리의 이분법에 빠져 점점 무질서로 향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정지와 진행의 지시만 전달하는 신호등은 얼마나 간명한가. 질서를 가지런한 단순함의 집합으로 여기는 착시가 현실의 함정이다. 가장 단순해 보이는 신호등조차 현실의 질서를 완전하게 만들지 못한다. 신호위반자도 상황의 논리를 주장한다.
규범과 법률의 세계는 마치 순간의 장면에 대응하기 위한 논리를 제공하는 아주 단순한 전문가의 영역으로 보일 때가 많다. 저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이 분명해 시작 단계에서는 행복해 보이지만, 승패에 관계없이 결과는 그리 즐겁지가 않다.
선거 운동에 들어서기 전까지 여야의 공천 과정만 되돌아봐도 그렇다. 각자 내부의 싸움에서 내세우는 기준은 선이고, 그것을 외부의 싸움에 이용한다. 패자가 주장한 선은 악으로 변한 것인지 그냥 소멸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결과에 해당하는 당선자들이 구성할 다음 국회가 질서를 연출할지 무질서를 토해낼지 두고 볼 일이다. 여야의 실질적 행위지배자는, 누구나 알다시피 법률가들이다.
차병직 법무법인 클라스한결 변호사 · 편집인
법률신문 2024년 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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