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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꿈을 이룬 너는 나의 챔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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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8-03-15 13:49 조회40,0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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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급당 학생 수가 예순 명이 넘던 시절이 있었다. 양쪽 클러치를 쓰는 한 장애 급우가 짧은 휴식시간에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느린 동작 때문에 다시 주저앉곤 하던 광경이 떠오른다. 교사부터 학생들까지 장애 친구를 비속어로 부르기 일쑤였고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경우는 드물었다. 부끄러운 기억이 아닐 수 없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각이 공존해 왔다.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시각이 있었다. 기피하거나 멸시하는 시각이 있었다. 연민과 자비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다. 마지막은 자선사업, 사회사업과 가까웠던 시각이다. 이러한 전통적 장애관에 혁명적 변화가 왔다. 그 변화의 핵심에 장애인권이 있다.

전세계적으로 1980년대 이래 개인이나 국가가 베푸는 ‘시혜’를 장애인이 ‘고맙게’ 받는다는 구도가 통하지 않기 시작했다. 장애인도 인격적 주체고, 국가공동체의 구성원 자격(시티즌십)을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동정의 시선보다는 인권과 그것의 완전한 향유를 바라는 흐름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인권에 기반을 둔 장애 개념은 실천과 이론 모두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장애인을 인도적, 종교적 정신에서 돕는다고 가정해 왔던 자선 모델은 방향 전환을 요구받았다. 장애인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당연시했던 관행들, 그리고 자선 모델에 비추어 보더라도 잘못된 조치들이 비판을 받았다. 학문도 마찬가지였다. 계급, 인종, 젠더에 몰두하던 사회과학에 장애라는 새로운 쟁점이 큰 과제로 등장했다.

국제적으로 장애인 권리는 늦게 발전한 편이다.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에는 장애에 대한 언급이 없다. 1966년의 양대 국제인권규약에도 장애가 규정되어 있지 않다. 1950년의 유럽인권협정에 정신장애에 관해 부수적 언급이 있었고, 1961년 유럽사회헌장은 장애인의 고용, 직업훈련, 주거를 별도 항목으로 다루었다. 국제노동기구는 1955년 장애인의 직업재활을 다룬 권고99호를 발표했다. 유엔도 1971년 지적장애인의 권리선언을 선포했고, 1975년에는 장애인권리선언을 제정했다.

유엔은 1981년을 국제장애인의 해로 정했고 그해 한국의 보건사회부는 4월20일을 제1회 ‘장애자의 날’로 지정했다. 유엔은 1983년부터 ‘장애인의 십년’ 기간을 선포했고, 그 이듬해에 최초로 장애인권 특별보고관을 임명했다. 1989년의 아동권리협약 23조는 정신적·신체적 장애아동에게 존엄성이 보장되고 자립이 촉진되며 적극적 사회참여가 장려되는 여건 속에서 품위 있게 살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인정했다.

유엔총회는 1990년대 들어 정신질환자 보호에 관한 원칙, 그리고 장애인의 기회균등에 관한 기본규정을 만들었다. 이런 단계를 거쳐 2006년 말에야 역사적인 장애인권리협약이 제정되었고 2008년 5월3일 드디어 발효되었다. 한국도 그해에 협약을 비준했다. 이처럼 장애인 권리가 국제법상의 인권으로 인정된 것은 최근의 일이라 할 수 있다.

왜 이렇게 늦어졌던가. 장애를 주로 병리적 현상으로 설명하고, 장애인은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하므로 의학적 개입과 사회사업적 지원이 최상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인권 원칙에 따르면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모든 인권을 똑같이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장애인 권리를 별도의 범주로 둘 필요가 없다는 형식논리도 한몫을 했다.

2006년의 장애인권리협약은 이런 경향에 종지부를 찍었다. 제정 과정이 속전속결이었고, 장애인 당사자단체(DPO), 비정부기구(NGO), 정부대표가 긴밀한 협의를 통해 도출한 국제조약이었다. 한국의 장애인 단체들도 뉴욕에서 협상과 로비에 적극 참여했다. 한 제자가 유엔본부에서 현장중계로 전해주던 이메일을 학우들과 함께 읽던 기억이 생생하다.

장애인권리협약은 장애인도 똑같은 존엄을 지닌 존재임을,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법적 주체성을 가진 인격임을, 참여하고 발언할 수 있는 대등한 시민임을, 모든 권리의 정당한 향유자임을 명쾌한 언어로 선포한다. 협약은 장애를 개인의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 장애란 어떤 손상을 지닌 사람과 사회 전체의 태도 및 환경적 장벽이 상호작용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는 사회적 모델을 취한다. 장애를 개인에게 고착된 낙인이 아니라, 사회환경이 좋아질수록 긍정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가변적 상태로 파악한다는 뜻이다.

협약은 장애인의 특수한 욕구 충족을 위한 권리를 요구하는 공민권적 접근을 넘어, 보편적 접근을 중요하게 다룬다. 전자는 장애인도 주류사회의 제도와 서비스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후자는 사회가 다수의 비장애인과 소수의 장애인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지 않는다. 누구라도 생애주기 속에서 잠재적으로 장애인이 될 가능성이 있고, 장애인들 중에도 기능적 제약의 정도가 다양하므로, 만인의 인권을 염두에 둔 포괄적 장애정책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장애인권리협약 덕분에 인권의 문법이 많이 변했다. 국가가 간섭하지 않으면 된다고 하던 자유권을 국가의 개입 의무가 발생하는 권리로 바꿔 해석한다. 예를 들어 표현의 자유를 접근 가능한 정보취득권으로 전환시켰다. 이렇게 되면 국가의 역할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의사결정을 둘러싼 관점에도 근본적 변화가 왔다. 과거에 장애인을 대신해서 결정해 주었다면, 이제는 장애인이 의사결정을 잘 내릴 수 있도록 돕는다는 패러다임으로 바뀌고 있다. 발달장애인이 어떻게 제대로 된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적 관념은 이제 구식이 되었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기 결정이 아니다. 장애인의 ‘자기 결정권’은 고전적인 두 차원의 자유론과 연결될 수 있다. 우선 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간섭받지 않고 자기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는 소극적 차원의 자유가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 진정 유리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기 위해 정부와 복지기관의 지원과 조력을 받을 적극적 차원의 자유가 있다. 이런 경우 사회복지사의 전문적 개입은 부당한 간섭이 아니라 자유의 증진에 해당된다.

장애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는 종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얼마나 진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이런 나라들을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주관적으로 느낀 바를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처음부터 수준 높은 국민은 없다. 사회의 조직 방식, 제도, 정책이 대중의 인식을 끌어올린다. 둘째, 장애인 권익운동과 공동선에 기반한 민주정치가 같이 갈 때에 장애인권이 발전한다. 양자가 분리되면 지속적인 변화가 어렵다. 셋째, 데인저와 리스크를 구분한다.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요소(danger)는 최대한 줄여야 하지만, 삶의 일부인 확률적 리스크(risk)는 감당하겠다는 능동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무조건 안전만 강조하면 장애인에게서 도전과 경험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고, 복지기관은 방어적이 되는 경향이 생긴다. 장애 당사자, 보호자, 서비스 제공자 사이에 리스크에 관해 공감대가 형성되어야만 혹시라도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 지혜롭게 책임 소재를 가리고 대처할 수 있다. 넷째, 장애인 권리가 보장될수록 의도치 않은 연관 효과가 발생한다. 장애인의 욕구를 이해하고 그것에 반응할 줄 아는 섬세한 시선의 대중이 많아지면 예술, 문화, 미디어의 감수성이 높아지고, 정치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수준도 올라간다. 비즈니스의 질도 향상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장애복지가 발전해도 젠더는 여전히 중요한 요소로 남는다. 여성 신체장애인, 여성 지적장애인의 인권침해에는 고유의 특성과 맞춤형 지원이 필요하다. 보호자와 부모와 돌봄 제공자 중에서도 어머니와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져 보이는 현상을 젠더 관점에서 고민해 봐야 한다. (후략)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18년 3월 13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35923.html#csidxb3fea8b7ee85fe09b5e893311c95a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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