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이 다케시] 민주주의의 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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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7-09-20 14:03 조회38,51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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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오빠>(にあんちゃん)라는 영화를 봤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1959년에 찍은 이 영화는 규슈 북부의 작은 탄광촌에서 부모를 잃은 재일조선인 4남매가 가난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탄광 노동자들의 투쟁이 격렬해지기 시작하던 제작 당시 상황을 반영해서 그런지 영화는 변방 탄광촌의 고된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주인공이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은 전혀 숨기지 않았다. 지금 보면 이런 영화가 상업영화로 제작되고 정부로부터 상까지 받았던 것이 기이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배경에는 영화의 원작이 당시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였다는 사실이 있다.
이 영화의 원작은 그 4남매의 막내인 야스모토 스에코라는 소녀가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쓴 일기다.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낸 그 일기는 출판된 지 채 1년도 지나기 전에 50만부가 팔렸으며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때 적지 않은 일본 사람들이 재일조선인들의 어려운 삶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고 공감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가 지녔던 휴머니즘적인 정서를 잘 보여준다. 아직 가난의 존재가 일상 속에서도 느껴지던 고도경제성장 이전의 일본 사회에서 사람들의 감수성은 국적을 쉽게 뛰어넘었다.
과거 일본 사회가 보여주었던 이런 측면은 일본에 대한 편견을 깨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일본 사회는 단순하지 않다. 전쟁과 패전의 과정에서 일본의 대다수 사람들이 겪은 고통스러운 경험은 확실히 그들의 공감능력을 키웠으며, 그것이 전후 일본에서 민주화가 진행될 때 큰 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그 공감에는 한 가지 측면이 빠져 있다. 재일조선인들의 고통이 어디서 오는지, 어쩌면 자신이 가해자는 아닌지 의심해보는 시선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일본 전후 민주주의가 지닌 한계로 그 ‘피해자 의식’이 지적된 지는 이미 오래다.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에 가담했던 ‘국민’을 군국주의의 피해자로 자리매김하면서 국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지향했던 것이 결국 제국주의 문제를 은폐했다. 전후 민주주의적 감수성은 국적을 뛰어넘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자신의 역사적 위치를 외면하는 한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과연 일본에 고유한 문제일까?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일본 또는 제국주의의 문제라기보다 오히려 민주주의나 민주화라는 시각 자체가 지닌 한계다. 민주화란 기본적으로 한 국가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보통 그것은 국민주권의 실현으로 생각된다. 전후 일본의 경우도 그랬고, 그 결과는 식민지배에 대한 망각이었다. 우리의 현실을 규정하는 힘들이 국경선을 넘어 작용하고 있을 때, 민주화를 중심에 놓은 사고는 오히려 구체적인 현실을 못 보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민주화를 이룩한 한국 사회에서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다.
민주화의 결과로 탄생한 대통령이 현충일에 베트남전을 ‘참전용사’ 입장에서만 평가해 베트남 정부로부터 항의를 받은 일이 생각난다. 2016년 통계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가운데 조선족이 태반인 중국을 빼면 베트남에서 온 이들이 가장 많다. 이제 15만명이나 되는 이들에게, 또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한국은 어떤 존재일까. (후략)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한겨레, 2017년 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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