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제] 신자유주의가 인권에 남긴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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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7-09-20 14:08 조회38,66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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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11663.html#csidx104341e2f3d78e1ac84eea0406bdeab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세상을 급격하게 오른쪽으로 몰고 갔다. 오늘날 인권은 신자유주의와 맞서 싸우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인권은 제자리에 있지만 세상이 과도하게 우경화되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곧 인권 본연의 길이 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낸시 프레이저는 부분적 인권론자를 ‘진보적 신자유주의자’라 부르면서 노동-계급운동과 정체성 정치가 함께 가야만 인권을 제대로 지킬 수 있다고 조언한다. 월스트리트와 정체성 정치를 접목하려다 실패한 힐러리 클린턴을 인권운동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례 하나. 해외 투기자본이 나라 경제를 엉망으로 만든다. 외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복지예산이 대폭 깎이면서 약자 계층의 삶이 절망으로 흐른다.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경찰은 집회 신고를 하지 않은 시위에 강경하게 대응한다. 부상자가 속출하고 사망자까지 나온다. 정부는 불법시위에 대해 무관용 원칙을 밝힌다. 이런 상황에 누가 궁극적으로 책임이 있는가. 정부인가 초국적 자본인가.
사례 둘. 대학과 교수들은 연구지원 기관의 프로젝트에 지원할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절대다수가 지원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 프로젝트를 따야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수주율 자체가 평가지표에서 유능함의 증거로 활용된다. 연구 목적도 심각하게 왜곡된다. 연구의 내적 가치보다 채택률을 높일 수 있느냐가 중요해진다. 지원기관이 선호하는 연구 주제와 방향성을 알아내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운다. 인센티브에 자발적으로 반응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자기검열을 한다면 학문의 자유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이런 국내외 사례들은 신자유주의가 인권에 던진 복잡한 도전을 보여준다.
작년 6월 국제통화기금의 공식 학술지 <금융과 발전>에 “신자유주의는 과대평가되었는가?”라는 글이 실렸다. 통화기금의 연구처 부국장인 조너선 오스트리 등이 집필한 논문은 신자유주의 의제란 탈규제와 국내시장 개방을 통한 경쟁력 강화, 그리고 민영화와 재정적자 감소를 통한 국가 역할의 축소가 그 핵심이라고 밝힌다. 이런 정책에 힘입어 국제무역에 의한 빈곤 완화, 개도국에 대한 기술이전, 효율적인 공공서비스 제공 등 긍정적 효과가 발생했다고 논문은 지적한다. 그러나 금융개방과 긴축정책이 성장을 촉진하지 못했고, 불평등을 급격히 확대시켰으며, 경제의 지속가능성을 떨어뜨렸다고 비판한다.
논문의 결론이 흥미롭다. “모든 나라, 모든 시대를 통틀어 양호한 경제적 결과를 낳을 수 있는 단일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 각국에 경제정책을 조언하는 국제통화기금은 신념이 아니라 실효성이 있다고 판명된 증거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 국제통화기금 연구부서의 최고 핵심 전문가가 자기 기관이 증거가 아닌 신념에 기대어 활동해 왔음을 고백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국제통화기금은 정책기관이 아니라 이념집단이었다는 말인가.
논문을 읽으니 만시지탄의 허탈감과 분노가 함께 밀려온다. 솔직히 말해 이 정도의 주장은 오래전부터 많은 논자들이 해 오지 않았던가. 아마 이와 비슷한 우려와 비판을 다룬 논문이 기백편도 더 나왔을 것이다. 그렇게 경고해도 듣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려 놓은 다음에야 뒷북을 치고 나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의 원조로 꼽히는 하이에크는 그것을 단순히 물질적 선익을 증진하기 위한 하나의 경제이론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에게 신자유주의는 총체적 세계관이었다. 애덤 스미스가 시장을 ‘보이지 않는 손’에 비유했다면, 하이에크는 자유시장을 독립적인 ‘자율의식’으로까지 격상시켰다. 이쯤 되면 경제학이 아니라 존재론적 형이상학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깊은 차원에서 인권에 여러 변화를 몰고 왔다. 우선, 이념의 스펙트럼에서 인권의 좌표를 크게 이동시켰다. 현대인권의 기원으로 꼽을 수 있는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었다. 18세기 이래 서구의 대표적 보편이념인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통합하려 한 사상사적 시도였다. 자유권과 사회권을 한 지붕 아래에 나란히 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선언의 제정 과정에서 1차 초안을 작성하여 전체 틀을 잡았던 유엔인권국장 존 험프리 교수는 인권선언이 “인도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결합”을 지향했다고 증언한다.
냉전 때 미·소 진영은 인권의 양 날개를 찢어서 각기 편리한 쪽으로 해석하려 했지만 당시 인권운동은 인권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피눈물 나는 노력을 기울였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비동맹권을 가리지 않고 인권의 원칙에 어긋나면 누구든 통렬히 규탄했다. 모든 진영을 비판하던 인권은 모든 쪽에서 욕을 먹었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인권의 불편부당성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냉전이 끝난 뒤 마침내 인권의 원래 취지에 부합하는 시대가 오는가 싶었지만 그것도 잠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세상을 급격하게 오른쪽으로 몰고 갔다. 오늘날 인권은 신자유주의와 맞서 싸우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인권은 제자리에 있지만 세상이 과도하게 우경화되었기 때문이다. 시대의 맥락으로 보아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곧 인권 본연의 길이 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둘째, 인권을 지킬 의무가 있는 국가의 정치적 책무성을 따지기가 어려워졌다. 원래 인권은 시민권적 사회계약을 상정하여 시민과 국가의 관계를 규율하는 논리로 출발했다. 요즘은 사적 개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도 인권 문제로 보는 경향이 생기긴 했으나 인권의 기본구조는 여전히 공적 영역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공적 시민의 정치참여가 아닌, 사적 소비자가 시장에서 선택권을 행사하는 것을 진정한 주권행사라고 본다. 이렇게 되면 빈곤층이든 중산층이든 실질적으로 공민권을 박탈당한 상태가 되고 주권재민 원칙은 속 빈 강정에 불과한 수사로 전락한다. 정상적인 정치과정 속에서 합리적 판단에 따라 투표를 해봤자 소용이 없음을 깨닫게 된 사람들은 점점 더 구호나 감성적 호소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되었다. 트럼프 지지자들에겐 팩트체크나 이성적 논증 같은 것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다. 자신의 정서적 갈구를 채워줄 강렬하고 자극적인 메시지?가짜 뉴스, 막말, 증오 선동과 같은 언술적 헤로인?만 계속 제공받으면 된다.
셋째, 신자유주의의 심리적 파괴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경쟁이라는 말만 붙이면 그 내용이 무엇이든 무조건 공정하고, 경쟁에 의한 결과는 그것이 불평등이든 차별이든 무조건 최선이라는 경쟁만능주의를 정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보편적 평등의식 따위는 사치스러운 농담으로 비친다. 경쟁심리를 내면화한 대중은 자기가 ‘못나서’ 낙오한 루저라면 차별당해도 마땅한 존재라고 무시하기에 이르렀다. 경쟁이 심한 사회일수록 자해, 거식증, 고립감, 성공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수행불안증, 그리고 사회불안장애가 많이 나타난다.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팍팍하게 살다 보니 사회부조리 따위를 생각할 여유도 겨를도 없어졌다. 그러다 보니 심성이 전반적으로 까칠해졌다. 이런 상태에선 타인의 불쾌한 언동이나 혐오표현과 같은 대인관계의 갈등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이른바 ‘미시적 공격성’이 인권에서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사람의 소망과 염원을 늘 어떤 미래시점에 투영하곤 한다. 지금은 힘들어도 조금만 더 열심히 경쟁하다 보면 언젠가 행복한 날이 올 것이라 가르친다. 죽기 전에 도달할 수 있는 일종의 ‘세속적 내세’를 끊임없이 우리 귀에 불어넣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약속하는 ‘그날’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신자유주의적 패러다임은 인권운동의 인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불평등과 같은 구조적 인권침해를 함께 다루지 않고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소수자와 같은 정체성 정치에만 치중해도 인권이 달성될 수 있다고 믿는 일부 경향이 그것이다. 낸시 프레이저는 이런 부류의 부분적 인권론자를 ‘진보적 신자유주의자’라 부르면서 노동-계급운동과 정체성 정치가 함께 가야만 인권을 제대로 지킬 수 있다고 조언한다. 월스트리트와 정체성 정치를 접목하려다 실패한 힐러리 클린턴을 인권운동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후략)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17년 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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