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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수] 기억상실의 독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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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8-01-09 13:56 조회39,0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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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품, 특히 소설을 의미의 자장 바깥에서 읽는 일은 쉽지 않다. 해체된 서사, 미로 같은 언어의 배열과 조직 안에도 문학적 의미의 자장은 존재한다. 혹은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한쪽에서 아무리 ‘저자의 죽음’을 외쳐도 우리가 소설 작품을 작가와 분리해서 읽기는 힘들다. 사실 가장 흔한 의미 연관은 여기서 생긴다. 우리는 소설의 배면에서 작가의 삶을 읽으려 하며 조금 더 전문적인 문학 비평은 ‘원체험’이라는 말로 이 의미의 사슬을 캐내고 의기양양해한다. ‘현실’은 우리가 소설에서 되찾고 다시 확인하려 하는 의미의 또 다른 과녁이다. 작품을 ‘텍스트’라고 부른다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결국 텍스트의 구조와 기호가 의미의 생산지가 된다. 어느 면에서는 독자의 자리야말로 최종적인 의미의 기착지이기도 하다. 독자는 결국 자신의 기억과 앎의 총체로서 작품 앞에 마주한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나쓰메 소세키론>은 전혀 다른 소설의 독법을 제안한다. 그가 보기에 소설 작품이나 작가를 둘러싼 ‘의미의 자장’은 문학사와 문학 제도가 만들어놓은 문학의 ‘신화’다. 그는 반문한다. “도대체 내면에 묻혀 있고 배후에 숨겨진 의미를 읽는 것이 ‘문학’이라고 언제부터 진심으로 믿게 된 것일까.” 내면이든 배후이든 의미 찾기는 결국 이미 형성되어 있는 ‘문학이라는 의미’의 체계로 돌아가고 환원되는 일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문학을 지식 혹은 역사로 소비하는 일과 무엇이 다른가.

 

문학이 문학인 이유는 바로 그 환원을 거부하는 언어의 다른 질서 때문이 아닌가. 그는 말한다. “문학에서는 모든 것이 표층에 드러나 있다. 의미 해독을 용이하게 하는 거리도, 깊이도 없는 채로, 모든 것이 서로 앞다투어 표층에 부상해 일제히 소란을 피우고 있는 장(場)이야말로 문학이 아닌가.” ‘문학’이라는 기억, 작가 누구라는 기억, 독자 ‘나’라는 기억이 상실되는 자리에서 벌어지는 현재적 운동으로서의 독서가 요청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말들의 출렁거림과 뒤섞이고, 작가와 독자가 비인칭의 자리에서 만나는 희박한 현재의 독서. 의미로, ‘나’로 환원되거나 회수되지 않고, ‘나’의 변용이 그 운동 속에서 실천적으로 일어나는 독서. 누구든 물을 것이다. 그런 게 가능하기는 하냐고. 모르겠다. 나로서는 저자에게 설복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후략)

 

정홍수 문학평론가

(시사인, 2018년 1월 6일)

 

원문보기: http://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3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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