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제] 바르샤바에서 야곱을 찾아 헤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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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7-07-26 10:57 조회38,13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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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폴란드 유대인의 역사는 인권을 둘러싼 모든 차원의 문제가 얽혀 있는 연구 주제다. 희생자와 가해자, 목격자와 방관자, 부역자와 보호자, 배척과 공존의 이슈가 뒤섞여 있는 모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폴란드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자국민 중에 ‘결백 강박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고 지적한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모든 것을 잃었던 국민으로서 붙잡을 동아줄이라고는 ‘우리는 죄 없는 약소민족’이라는 결백감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방적 희생자 의식은 역사 부인을 쉽게 용인하게 만든다.
아주 쉬운 역사 퀴즈. 이스라엘 건국 전까지 세계에서 유대인이 제일 오래, 제일 많이 살았던 나라는? 유대인이 스스로 가장 좋다고 평가했던 나라는?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소비보르, 마이다네크, 트레블린카, 헤움노, 벨제크(베우제츠) 등 나치의 악명 높은 절멸수용소가 모여 있던 나라는? 홀로코스트로 죽어 간 육백만 유대인 중 절반이 나온 나라는?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이 된 나라는? 나치와 소련의 박해를 받았으면서 유대인을 박해하기도 한 복잡한 과거사를 지닌 나라는? 정답은 물론 폴란드이다.
인권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폴란드 유대인의 역사는 인권을 둘러싼 모든 차원의 문제가 얽혀 있는 연구 주제다. 희생자와 가해자, 목격자와 방관자, 부역자와 보호자, 배척과 공존의 이슈가 뒤섞여 있는 모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바르샤바의 옛 게토 지역에 최근 건립된 ‘폴란드 유대인 역사박물관’을 돌아보니 그런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건물의 위치도 상징적이다.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1970년 폴란드를 방문하여 바르샤바 유대인 게토 봉기 기념탑을 찾아 무릎을 꿇었던 사진을 기억할 것이다. 박물관은 그 탑을 마주보고 서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경고가 무슨 뜻인지 이곳에 와 보면 알 것도 같다.
폴란드의 유대인 역사는 흔히 천년 세월로 친다. 중세가 되면 이미 폴란드 전역의 도시와 타운에 유대인 거주지역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프랑스 혁명 전에 이미 계몽주의적 평등과 관용의 풍토를 가진 나라였다. 유대인들 자신이 폴란드를 ‘유대인의 낙원’(파라디수스 유대오룸)이라 부를 정도였다. 가톨릭교회가 종종 박해를 하고 군주가 재정상의 이유로 유대인을 감싸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어쨌든 당시 유럽 기준으로는 양호한 거주조건이었다고 한다.
18세기 전반에 전세계에 유대인이 약 120만명 정도 있었는데 그중 75만명이 폴란드에 살았다는 연구도 있다. 팔레스타인을 떠난 뒤 유대인에게 말 그대로 제2의 고향이 된 나라였다. 그러나 폴란드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분할된 뒤 유대인의 생활도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폴란드가 독립한 뒤에는 국제연맹의 소수민족 보호규정과 피우수트스키 정부의 통합정책에 따라 유대인의 지위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2차 대전 직전 폴란드 정치가 우경화되고 반유대주의 선동이 일면서 유대인에게 불안한 시절이 계속되었다. 심지어 대학교 강의실 공간에서 유대 학생용 자리를 따로 분리시켜 지정할 정도였다. 폴란드 정부는 나치 독일의 인종주의를 반대하면서도 자기 내부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옹호하는, 모순된 행보를 보였다.
나치는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했고 그 직후 소련도 폴란드 동부를 합병한다. 그다음의 이야기는 잘 알려진 역사다. 전쟁 직전의 인구 센서스에 따르면 당시 폴란드에 347만의 유대인이 있었는데 홀로코스트로 약 300만명 이상, 즉 90%가 희생되었다. 이때 폴란드 국민이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가 오늘날까지 논쟁이 되고 있다.
나치 점령군은 유럽을 통틀어 유독 폴란드에서 가장 가혹한 정책을 펼쳤다. 유대인을 조금만 도와도 무조건 사형, 그것도 연좌제를 적용했다. 이 때문에 폴란드 사람이 유대인을 돕는 것은 전 집안, 온 동네의 생명을 걸어야 하는 행동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유대인을 도왔던 영웅적인 ‘이방의 의인들’이 다수 나왔다. 이스라엘의 보훈청 야드바솀의 집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알려진 ‘의인’은 국제적으로 모두 2만6120명, 그중에서 폴란드 출신이 6620명으로서 단연 1위를 차지한다.
하지만 나치에 부역하여 유대인을 추방하고 밀고한 폴란드 사람이 많았고, 직접 유대인 학살에 참여한 사건도 23건이나 된다. 나치의 강요와 반유대주의 정서 탓이 컸고, 유대인의 재산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도 한몫을 했다. 소련이 합병한 동부에서 일부 유대계 공산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적’을 색출하는 데 앞장선 것이 폴란드인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폴란드의 동부가 소련 영토로 영구 편입되는 바람에 그곳 출신의 유대인이 돌아갈 고향이 없어졌다. 자신의 집과 재산이 모두 파괴된데다 타인이 점거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생존자가 일시에 난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폴란드 유대인의 역사는 이주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공산정권이 싫기도 했고, 일가친척이 사라진 저주의 땅에서 계속 살고 싶은 생각이 없기도 했다. 2차 대전 직후의 그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반유대 폭동이 일어나 수십명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때 팔레스타인으로 떠난 유대인은 이스라엘 건국의 중추세력이 되었다. 스탈린 사후에 잠시 개방화 물결이 일었을 때에도 대규모 이주가 일어났다.
오늘날 폴란드에는 유대인이 많지 않다. 자신을 종교적 의미에서 유대인으로 내세우는 사람은 1만~2만명에 지나지 않는다. 굳이 뿌리를 밝히지 않고 사는 유대계를 다 합쳐도 그 수가 많지 않을 것이다. 바르샤바에서 야곱을 찾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배경에서 유대인 역사박물관이 설립된 것은 작은 기적이자 역설이라 할 만하다.
현재 폴란드의 정세는 대단히 우려스럽다. 우파 포퓰리즘의 ‘법과 정의당’이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권위주의적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는 역사 연구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폴란드의 나치 부역행위를 연구하는 학자는 ‘반국가적’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폴란드 수용소’라고 부르면 징역형에 처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 발의되어 있다. 폴란드 국민이 유대인을 학살했던 사건을 연구해온 역사학자 얀 그로스 교수는 국가모독죄로 수사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 조치를 ‘적극적 역사정책’이라고 되레 강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집권여당은 사법부의 독립성을 결정적으로 침해하는 법안을 제출해 놓은 상태다. 유럽연합(EU)은 만일 이 법이 제정되면 유럽연합에서 폴란드의 투표권을 박탈하겠다는 최후통첩을 했다. 이 글을 쓰던 중 바르샤바대학 앞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며 유럽연합 깃발과 촛불을 들고 집회를 벌이는 모습을 보았다. 한국인으로서 기시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폴란드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자국민 중에 ‘결백 강박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고 지적한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모든 것을 잃었던 국민으로서 붙잡을 동아줄이라고는 ‘우리는 죄 없는 약소민족’이라는 결백감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방적 희생자 의식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고, 무조건적 역사 부인을 쉽게 용인하게 만든다.
이런 식의 역사 왜곡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건강성을 회복하는 지속적 과정 속에서, 그리고 민주체제 내에서 조금씩 극복될 수 있다. 하지만 어렵사리 도달한 개방적 역사관도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순식간에 무너지곤 한다. 요즘 폴란드는 유럽연합 국가 중에서 헝가리와 함께 문제아 형제 비슷한 존재로 찍힌 상태다. 난민을 받아들이면 기생충과 전염병이 퍼진다고 집권여당 대표가 공공연하게 막말을 하는 외국인 혐오의 나라가 된 것이다. (후략)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17년 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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