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렬] 분단과 탈원전 ‘모순의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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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7-11-11 16:51 조회38,85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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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영국과 독일은 여러 면에서 대조되는 나라다. 산업에서 영국은 세계시장을 선도하는 ‘히든 챔피언’이 100개에도 못미치지만, 독일은 1300개에 달한다. 정치에서 영국은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지만, 독일은 패자도 종종 꽤 큰 몫을 가져간다. 교육에서도 영국은 엘리트 중심이지만, 독일에선 엘리트라는 말도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원자력 정책에서는 두 나라가 유럽의 양극단을 대표한다. 영국은 원자력을 크게 늘리려 하지만, 독일은 없애가고 있다. 20년 후에 영국에서는 지금보다 두 배 많은 원자력 발전소가 전기를 생산하게 된다. 반면에 독일에서는 5년만 지나면 원전이 모두 사라진다. 영국 정부는 원자력이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으며, 값이 싸다고 주장한다. 반면 독일 총리는 원전사고는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고 말한다.
영국에서 원전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영국과 독일의 이러한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지 꽤나 궁금해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영국 서섹스대학 과학정책연구소의 학자들이 두 나라의 차이에 대해 탐구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여기에서 그들은 산업이나 전력수급에서 원자력발전이 차지하는 무게로 볼 때 영국이 독일보다 훨씬 가볍고, 따라서 원전 포기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은데도 원전 확대를 선택한 이유로 두 가지를 든다. 하나는 영국은 원자력의 군사적 이용에 대한 관심이 강하지만 독일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 또 하나는 영국의 민주주의의 질적 수준이 독일에 비해 상당히 낮다는 것이다.
영국은 원자탄과 수소탄을 수백개 보유하고 있다. 핵추진 잠수함도 10개 이상 가지고 있고, 퇴역 핵잠수함 27개의 원자로는 해체를 기다리는 중이다. 영국의 이름난 기업들은 이들 군사적 핵기술에 깊숙이 관여되어 있다. 고급 자동차회사로 널리 알려진 롤스로이스는 핵잠수함의 원자로 관련 설계, 제작, 운영 분야에서 세계적 선도기업이다. 반면에 독일은 원자탄은 물론 핵잠수함도 없다. 원자력 산업 부문에서는 지멘스가 세계 여러 나라에 원전을 수출하며 오랫동안 시장을 주름잡았지만, 2011년 후쿠시마 사고와 독일의 원자력 포기 결정 후에는 원자력사업에서 손을 뗀다고 선언했다. 지금은 원자력 대신 해상 풍력발전에 집중하고 있다.
영국과 독일은 ‘군사적 이용에 대한 강한 관심-원전 확대’ ‘군사적 이용에 대한 관심 없음-원전 포기’라는 명확하고 이해가능한 태도를 보여준다. 이에 비해 원자력발전을 없애 가겠다면서 핵잠수함을 건조하고 원전을 수출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행보는 좀처럼 이해가 안된다. 도널드 트럼프가 왔다 간 후 핵잠수함 건조는 거의 기정사실이 되었다. 한·미원자력협정도 핵잠수함 건조를 가능하게 하는 방향으로 개정될 것이고, 이에 따라 20%에 달하는 고농축 우라늄 확보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20% 농축우라늄을 사용하는 원자력발전소를 품고 있는 핵잠수함을 제작하는 것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선언과도 모순이지만, 한반도 비핵화정책과도 모순이다. 20% 농축우라늄으로도 원자탄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원자탄은 우라늄 농축도가 90% 이상이어야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농축도가 높을수록 우라늄의 양이 적어질 뿐이다. 100%의 농축우라늄은 임계질량이 47.5㎏이고, 20% 농축우라늄의 임계질량은 750㎏이다. 따라서 750㎏이 두 개로 나뉘어 있다가 폭발 순간 합쳐지는 ‘건 타입(Gun Type)’ 원자탄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후략)
이필렬 방송대 교수 문화교양학부
(경향신문, 2017년 1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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