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제] 대학 인권을 상자 바깥에서 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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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7-11-28 16:16 조회38,70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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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20069.html#csidx37a889795a1785da406808f0be32ab9
대학 인권은 현실적으로 골칫거리지만 이론적으로도 어렵다. 법적으로 처리해야 할 정도의 심각한 사안도 있지만 해석과 뉘앙스에 달린 문제도 있다. 관행의 이름으로 대수롭지 않게 용인되던 일들이 하루아침에 인권 문제로 폭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학내 민주주의 수준을 높여서 학생, 직원, 교원이 참여하고 숙의하는 전통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해야 자연스럽게 갑질 문화가 줄고, 약자가 최소한의 대항력을 확보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학생들이 부당한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되 스스로의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요즘 전국 대학들이 인권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대학 인권 관련 보도가 나온다. 아마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대학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학 인권’에는 여러 차원의 문제가 섞여 있다.
우선, 학생들 특히 대학원생에 대한 이른바 교수 갑질의 문제가 있다. 사적 업무지시, 연구비 횡령, 연구성과 도용, 노동 착취, 학위와 미래에 관한 위협이 그것이다. 법인과 대학자금의 유용, 횡령, 배임 등 사학비리도 있다. 예체능계 학생에게 강압적 규율과 폭력을 행사하고 그들의 학습권을 침해하기도 한다.
의사교수가 전공의에게 가혹행위를 하고, 전공의는 간호사에게 분풀이를 하고, 간호사는 후배 학생을 ‘내리 갈굼’하는 연쇄 유린도 발생한다. 단톡방 익명 게시판에서 학생 간 성희롱, 성차별적 콘텐츠의 유포, 혐오 표현에 의한 인격살해가 이 순간에도 진행 중이다. 교수의 막말, 폭언, 폭력, 인종·성별·외모·나이에 관한 차별 발언, 성희롱·성추행, 부적절한 신체접촉 등의 문제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이슈들이 ‘대학 인권’이라는 모호한 표현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인터넷 포털의 검색어 트렌드 서비스에서 지난 2년간 대학과 인권, 두 단어를 조합한 검색빈도를 찾아보면 성희롱·성추행 사건과 교수 갑질 사건이 터졌을 때 특히 폭발적으로 검색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의 목적을 위해 편의상 ‘대학 인권’을 “대학이라는 교육공간에서 어떤 구성원이 제도상의 결함 혹은 위배, 그리고 타 구성원(들)의 언행이나 조치로 인해 피해, 차별, 모욕, 불이익, 부당함을 경험하거나 인격침해를 받았다고 인식하여 발생한 문제들을 통칭하는 관행적 용어”라고 폭넓게 규정해 보자.
대학 인권은 현실적으로 골칫거리지만 이론적으로도 어렵다. 법적으로 처리해야 할 정도의 심각한 사안도 있지만 해석과 뉘앙스에 달린 문제도 있다. 관행의 이름으로 대수롭지 않게 용인되던 일들이 하루아침에 인권 문제로 폭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올바름’이 충돌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세대 간 인식의 격차를 반영하는 갈등도 많다. 문제가 대학 당국의 관할권 범위 내에 있는지 분명치 않을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성인 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에 대학이 어느 정도나 개입해야 하고,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할지 정하기 어렵다.
흔히 사람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인권을 호명하곤 한다. 우선 ‘제도로서의 인권’이 있다. 국제규범이나 실정법, 또는 학칙에 확실히 규정되어 있는 사항이다. 이때 해결의 기준과 절차가 비교적 명확하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 주관적으로 억울하다고 느끼는 모든 문제를 ‘인권’의 이름으로 불러낼 때가 많다. 이것은 ‘은유로서의 인권’이다. 대학 인권에는 두 가지가 혼재되어 있어 해결이 어려워지는 경향이 있다.
대학 인권 문제를 쉽고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왕도는 없다. 상자 안에서 해결하는 방법과 상자 바깥에서 접근하는 방법으로 나눠 설명해 보자. 전자는 인권이라는 구체적 이슈에 초점을 맞춰 인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주류적 방법이다. 이것을 위해 여러 아이디어가 나와 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인권을 다루는 기구와 절차를 통해 대처하고, 교육·계몽·홍보를 통해 구성원들의 의식을 바꾸려는 접근 방식이다. 최근 전국의 237개 대학을 상대로 시행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한 97개 대학 중 19개 대학에 인권센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서울대처럼 성희롱·성폭력 상담소에서 인권센터로 진화한 경우도 있다. 현재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의원의 발의로 모든 대학에 인권센터 설치를 의무화하자는 고등교육법 개정 법률안이 제출되어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대학원이 설치된 전국 182개 대학에 인권전담기구를 만들라는 권고를 내놓았다. 고려대, 동국대, 서강대, 성균관대, 한양대 등에서는 교수의 성차별적 언행을 강의평가에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인권을 침해한 구성원에게 인권교육을 의무적으로 이수하게 하는 학교도 있다. 대학평가의 기준에 인권지표 항목을 추가하자는 제안은 진지하게 고려할 만하다. 성공회대에서는 내년부터 모든 신입생이 인권과 평화라는 과목을 교양필수로 이수하게 된다. 연세대는 피해자-가해자의 단순 구도를 넘어 공동체 전체를 살리는 회복적 정의 개념으로 인권에 접근한다.
대학 인권센터의 학내 위상, 독립성, 법적 권한이 제한적이라는 이유로 그것에 회의적인 시각을 갖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인권 전담조직이라는 상징성과 표출성이 구성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적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인권을 순수하게 법적 논리로만 다룰 수는 없다. 인권센터이든 상담소이든 피해를 당한 사람이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창구가 있으면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나는 인권에 특화된 제도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더 큰 그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상자 안에서만 인권을 논하는 태도는 원근법을 무시하고 세밀화에만 몰두하는 것과 비슷하다.
바로 이 때문에 상자 바깥에서 접근하는 방법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학내 인권 문제의 발생을 원천적으로 줄이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보다 용이하게 해결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것을 위해선 대학의 일차적 사명을 재확인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공자님 말씀처럼 진부하게 들릴지 몰라도 길게 보면 제일 확실한 방법일 수 있다.
1992년 루마니아의 시나이아에서 유네스코의 유럽고등교육센터 주최로 학문의 자유와 대학의 자율에 관한 국제학술회의가 열린 적이 있다. 회의는 학문의 자유를 “학자가 고등교육기관에서 특정한 지적 개념을 활용하고, 지적 활동의 경로를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자유”라고 규정한다.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대학의 자율도 필수적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회의에서 채택된 문헌이 ‘시나이아 성명’이다. 성명은 대학의 연구와 당파적 연구를 구분 짓는다. 전자는 개방적이고 독립적이고 제약 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대학인들 스스로 학문의 자유를 육성할 책임이 있고, 정부와 대중은 대학이 자유로운 연구와 사회적 비판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존중해야 한다. 또한 대학은 관용의 가치와 평화적인 문제 해결을 절대적으로 중시해야 하며 이런 자세가 없으면 대학의 역할은 말할 것도 없고 문명사회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학문의 자유, 대학의 자율에다 학내 민주주의를 더한 세 개의 치열한 불기둥이 대학 인권을 위한 선결 조건이 되어야 한다. 금기시되는 연구주제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꼭 필요하지만 인기 없을 것 같은 이슈는 알아서 피해가고, 고액의 프로젝트에 조건반사식으로 반응하는 대학은 대학의 자율이니 독립이니 하는 대접을 받을 자격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외부 지원을 받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 원칙을 지키려는 강렬한 문제의식이 먼저 깔려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대학의 큰 줄기가 처음부터 뒤틀려 있다면 그 안에서 제대로 된 인권의식이 나오기는 어렵다.
학내 민주주의 수준을 높여서 학생, 직원, 교원이 참여하고 숙의하는 전통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해야 자연스럽게 갑질 문화가 줄고, 약자가 최소한의 대항력을 확보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학생들이 부당한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되 스스로의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그렇게 해야 대학의 운영에 따르는 현실적 고충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구성원들 간의 신뢰도가 높아진다. (후략)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신문, 2017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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