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렬] 창조과학과 근본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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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7-09-12 13:57 조회38,68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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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 전 내가 공부했던 베를린 공과대학은 바이마르 시대와 제3제국 시기 나치의 아성이었다. 100여명에 달하는 과학기술자들을 몰아내는 데 나치 학생과 교수들이 앞장섰고, 전쟁 중에는 무기 연구로 히틀러에 충실히 봉사했으며, 학교 안에 우크라이나에서 끌고온 강제노동자 수용소까지 두고 이들을 부려먹었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군은 이를 교정하기 위해 베를린공대 학생들에게 인문교양을 수강하도록 했지만, 나치에 부역했던 과학기술자들은 유용하다는 이유로 여전히 교수와 연구자로 대학에 남을 수 있었다. 내가 학생과 조교로 몸담았던 화학부에서는 화학무기 연구에 남다른 흥미를 보였던 골수 나치 게르하르트 얀더가 1961년 은퇴할 때까지 오랫동안 학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렇게 과학기술자들은 오직 유용하다는 이유로 비교적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 그 결과 연합국은 나치 과거에 상관없이 이들을 수천명 이상 자기 나라로 ‘모셔’갔고, 독일에 남은 사람들은 큰 어려움 없이 요직을 차지할 수 있었다.
과학기술자들의 정치적 성향에 상관없이 유용성에만 주목하는 것은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다른 나라보다 더 강한 것 같다. 그리고 이 경향은 독재정부나 민주정부 모두 차이가 없다. 다른 점이라면 독재정부는 애국심을 부추기고 꽤 큰 보상을 내걸면서 유용성을 활용하려 했다면, 민주정부는 반민주, 반지성 성향을 가진 과학기술자를 ‘생활보수’, ‘다양성’, 종교의 자유, 일만 잘하면 된다 같은 면죄부성 말로 정당화해줌으로써 활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유용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의 도구적인 성격에만 주목하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얼마 전 정부로부터 면죄부를 받은 창조과학자가 속한 집단도 과학기술을 도구로 취급한다. 이들에게 과학은 성경의 창조를 증명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과학 중에서 이 증명에 장애가 되는 것은 부정해야 할 것이 된다. 진화론, 빅뱅이론, 천체물리학, 지질학, 고생물학은 성경의 창조과정을 부정하기 때문에 배격되어야 한다. 그러나 통계역학이나 엔트로피 이론, 오래전에 폐기된 대격변설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져 창조를 증명하는 데 활용된다.
그런데 창조과학이 배격하거나 받아들이는 과학이론들은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모두 수천년에 걸친 인류의 지적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고, 그 발달과정 속에는 우주, 자연, 생명에 대한 깊은 사유가 담겨 있으며, 서로 연관되어 있어 홀로 떨어져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 과학이론을 분리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입맛에 맞는 것을 취사선택하는 창조과학은 과학 속에 깃들여 있는 사상과 철학을 제거하고 단순한 도구로 취급하는 반지성적 활동이다. 반지성은 생활보수가 아니라 근본보수와 연결된다. 수천년에 걸쳐서 발달해온 과학은 열린 지성의 산물이다. 오류가 드러나면 인정하고 고치면서 발달해왔던 것이다. 반면에 창조과학은 걸림이 되는 것은 철저히 배격하고 유용한 도구만 찾는 닫힌 활동이다. 근본보수도 마찬가지로 성찰과 반성이 들어가기 어려운, 닫혀 있는 태도이다. 창조과학이 근본보수와 연결되기 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활보수라는 표찰을 부여받은 창조과학자가 이승만과 박정희를 찬양한 것도 우연이 아닌 것이다. (후략)
이필렬 방송대 교수 문화교양학부
(경향신문, 201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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