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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인권교육과 세계인권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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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8-01-03 09:40 조회38,9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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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그레이드된 인권교육에 어떤 내용이 포함되어야 할까. 그동안 인권교육에서 부족했던 부분, 즉 인권의 역사적 차원, 인권문제를 다루는 맥락, 그리고 인권에 관한 생생한 스토리텔링을 강화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을 위해 세계인권선언을 중심에 둔 인권교육이 하나의 답이다.

세계인권선언을 처음 읽어본 사람들은 흔히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규정한 22조부터 27조 사이의 내용에 놀라곤 한다. “이런 게 언제부터 인권이었나요”라고 묻는 사람도 있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 사회의 인권의식이 국제기준에 비해 70년이 지체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인권 관련한 교육이 늘어났다. 서울시를 위시하여 공무원들에게 인권교육을 실시하는 지방정부가 많아졌다. 사회복지기관이나 교육계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런 현상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인권교육을 한번이라도 받아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교육 내용을 완전히 내면화하지 않더라도 인권을 강조하고 교육을 실시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사회적 행동의 새로운 준거점을 일깨우는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현재 시행 중인 인권교육은 지식과 정보의 제공, 그리고 행동 변화를 위한 인식 제고라는 양대 축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런 방식에서는 인권침해의 설명, 인권보호 규정 소개, 매뉴얼식 대처 방법 등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이런 접근이 초기 인권교육의 모델이었다면 앞으로 인권교육을 내용과 형식 면에서 더 풍부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표준교안에 따른 엇비슷한 내용을 매년 되풀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업그레이드된 인권교육에 어떤 내용이 포함되어야 할까. 그동안 인권교육에서 부족했던 부분, 즉 인권의 역사적 차원, 인권문제를 다루는 맥락, 그리고 인권에 관한 생생한 스토리텔링을 강화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을 위해 세계인권선언을 중심에 둔 인권교육이 하나의 답이다. 2018년이 유엔에서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인 만큼, 이를 인권교육을 개혁할 수 있는 절호의 계기로 삼을 만하다.

몇해 전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라는 소책자가 우리 독서계에 큰 울림을 준 적이 있다. 에셀은 그 책에서 세계인권선언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한 이야기를 하면서 오늘날에도 이 선언이 얼마나 적실한지를 강조한다. 그때 우리나라에 세계인권선언에 관한 책이 얼마나 출판되어 있는지 검색해보았다. 한 권도 없었다. 설마 해서 여러번 확인했는데 정말 한 권도 나오지 않았다. 상당히 놀랐다. 우리 인권교육의 척박함을 보여주는 증거 같았다. 그 때문에 일종의 의무감에서 세계인권선언을 해설한 책 <인권을 찾아서>를 출간하기도 했는데, 지금도 당시에 느꼈던 당혹감을 떠올리면 씁쓸해진다.

책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세계인권선언에 대한 관심 자체가 적은 것은 적잖게 걱정이 된다. 물론 이유가 있다. 일단, 70년 전의 선언이어서 딱딱한데다 구식으로 들리는 구석이 많다. 게다가 짧은 텍스트에 역사, 사상, 철학, 법학과 관련된 논의가 빼곡하게 들어 있어서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압축파일을 풀듯 늘여서 자세히 설명을 해야 한다.

너무 모범생 같은 톤으로 일관해서 우리의 팍팍한 인생살이에 살갑게 다가오는 감흥이 부족한 점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차별과 증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 ‘진지충’이라고 냉소하는 극혐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해도 인권의 규범적인 원칙을 포기할 순 없다. 조지프 히스가 말한 ‘제정신 정치’를 위해서라도 세계인권선언의 진지한 호소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계인권선언은 인권교육의 출발점이 되어 마땅하다. 누가 뭐라 해도 인권의 바이블이기 때문이다. 세계인권선언 외에도 1993년의 빈(비엔나)국제인권선언 등 여러 선언이 나왔지만 그 어떤 문헌도 세계인권선언만큼의 지지와 권위를 누리지 못했다.

세계인권선언이 어째서 이런 무게감을 갖게 되었는가. 우선, 보편의 의미를 재정립했기 때문이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흔히 ‘세계인권선언’이라 하지만 실제 원문은 ‘인권의 보편선언’이다. 보편인권이 선험적으로 존재한다고 가정하지 않고, 인류의 중지를 모아 인권의 대의를 ‘더불어 함께 선포’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민주적 합의에 의해 인권 개념과 구체적 내용을 정립했다는 뜻이다.

또한 세계인권선언은 흔히 서양 인권역사에서 상식처럼 되어 있던 자연권적 천부인권설에서 탈피하여 인권의 철학적 토대를 인간의 이성과 양심, 존엄, 평등(반차별), 자유, 우애의 정신에 두었다. 인권의 사상적·문명적 기원을 괄호 안에 둔 채 새로운 인간관을 선포의 형식으로 제시했다. 일종의 사회구성주의적 인권론으로 출발한 것이다.

경제·사회·문화적 권리가 정식 인권목록에 포함된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 미국독립선언이나 프랑스혁명 인권선언과 확연하게 대비되는 부분이다. 세계인권선언을 처음 읽어본 사람들은 흔히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규정한 22조부터 27조 사이의 내용에 놀라곤 한다. “이런 게 언제부터 인권이었나요”라고 묻는 사람도 있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 사회의 인권의식이 국제기준에 비해 70년이 지체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 세계 최고의 교육열을 자랑하는 나라 사람의 인권의식이 이 정도에 불과한 것을 우리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사상사적 측면에서도 생각해볼 점이 있다. 나는 위에서 말한 책을 쓰면서 선언의 제정위원회에서 부위원장을 지냈던 중국 출신 장펑춘 박사의 활약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공자의 인(仁) 사상에서 인권의 정신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사람(人)이 둘(二) 있을 때 서로 간에 취해야 할 상호존중의 정신이 인(仁)이라는 것이다. 장펑춘 박사는 볼테르와 같은 유럽 계몽주의자들이 유교철학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고, 그것이 근대 인권사상에 영향을 끼쳤다고도 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장 박사의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황태연·김종록이 저술한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를 읽고 공맹의 국가철학, 동아시아 과거제도, 관료제, 양호국가 개념, 민본주의, 예치, 덕치, 간언, 상소제도 등이 서구 계몽주의에 깊은 통찰을 제공했음을 알게 되었다. 서로 다른 문명이 만나 새로운 사상체계를 창조한다는 이론을 ‘공동형성학설’이라고 하는데, 인권 역시 예외가 아닌 것이다.

물론 세계인권선언이 완벽하다고 할 순 없다. 오늘의 눈으로 보면 70년 전의 시대적 한계가 많이 드러난다. 국민국가 체제의 바탕 위에서 전 인류의 인권을 말하는 모순이 대표적인 한계다. 법, 정치, 경제, 사회보장, 노동, 교육 등 근대적 시스템을 전제로 한 것이 전세계 원주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양성평등과 이른바 ‘정상’ 가족을 당연시했던 관점도 21세기의 시각으로 보면 구식이다.

구체적 권리의 조항 하나하나가 모두 새로운 논쟁거리로 등장한 점도 고민해봐야 한다. 예를 들어, 노예나 종속상태를 금지한 규정이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먹고살기 위해 ‘자발적으로’ 예속관계에 진입하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는 풀기 어려운 문제다. 인권을 인간 중심적으로 규정해놓은 점도 생태계 보존이라는 작금의 절체절명의 과제에 비추어 보면 너무나 아쉬운 대목이다.

이런 한계가 분명 있지만 그것이 세계인권선언의 본질적 가치를 폐기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다. 여러 흠결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인권의 공통분모를 설정한 공로, 그것 하나만으로도 선언의 의미가 크다. 요즘같이 전세계가 극도로 갈등하는 상황에서는 세계인권선언과 같은 낙관적인 문헌에 인류가 합의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인권교육에서 세계인권선언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우선 선언의 역사성과 그것의 진화 과정 및 정치적·국제적 맥락을 잡아주는 길잡이 강의가 필요하다. 오늘의 문제의식으로 선언의 조항들을 비판적으로 따져보거나, 각 조항과 관련된 활동을 하는 개인이나 엔지오(NGO) 사례를 찾아볼 수도 있다. 21세기 한국 사회에 필요한 맞춤형 인권선언을 다시 쓰는 연습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후략)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17년 12월 19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24215.html#csidx0ed8aba2ec66456bdf5dcda886c60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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