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영] 혁신적 분권 성장의 새로운 접근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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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7-10-26 09:18 조회38,64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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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연휴가 지나고 다시 일상의 긴장이다. 국정감사장의 고성이 전해지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정치투쟁’이 시작되었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에서는 벌써부터 내년 지방선거를 의식한 샅바잡기에 나선 모양이다. 당장 기세를 올리고 눈앞의 지지율을 챙기는 것이 장기적·거시적 성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족식(足食)과 족병(足兵)에서 차분히 기본을 챙겨야 결국은 민신(民信)이 쌓인다.
지금으로서는 문재인 정부가 지지율을 다투는 상대는 야권보다는 스스로의 비전과 능력이 될 가능성이 높다. 많은 국민들에게 불안감을 주는 것은 외교안보 환경과 정책 능력이다. 선진국 경기동향이 작년 이후 호전 추세인 것은 좋은 조건이다. 다만 새 정부의 큰 그림이 제시되지 않은 채 개별정책이 나오곤 했다. 경제주체들에 새 정부 메시지에 대해 어수선한 느낌을 주었다. 늦게나마 문재인 대통령이 수요 측 소득정책, 공급 측 혁신정책, 공정경제 기반정책의 틀을 종합적으로 교통정리했다. 정책비전과 개념의 혼선을 많이 잠재운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혁신정책의 골격과 내용을 내놓아야 할 시기다. 그런데 이 부분은 소득정책이나 공정경제 정책 분야에 비해 준비 정도가 취약한 것으로 보인다. 과학기술 및 산업정책 관련 인사 과정을 보면, 소득주도성장론과 조화를 이루는 혁신성장정책에 대한 방향이 확고히 정립되지 않은 것 같다. 현 정부는 4차 산업혁명 담론을 경제·사회체제를 혁신하는 의제로 자리매김하지 않고 있다. 대신 과학기술 및 창업 분야에 대한 보조와 규제 완화라는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이는 혁신에 대한 낡은 접근방식이다.
혁신성장을 위한 새로운 접근법은 혁신을 위한 커먼즈(commons)를 형성하고 공급하는 것이다. 커먼즈는 중세 유럽 농촌에 존재했던 숲, 황무지, 늪지, 하천 등과 같은 공유지(共有地)를 의미하는 말이다. 최근 들어서는 자원관리와 성장에서 시장과 국가 이외의 해결책이 자주 논의되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엘리너 오스트롬은 공유자원 관리의 다양한 증거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산업성장에 관한 종래의 정책은 신산업을 선별하고 관련 기업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진국들은 이제 대기업이건, 중소·벤처기업이건 개별 기업을 지원하지는 않는다. 중점은 혁신생태계 형성을 지원하는 데로 옮겨갔다. 이제 새로운 산업은 이종 산업들 간의 융·복합을 통해 형성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 때문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커먼즈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기업이나 산업을 중앙정부가 지원하여 육성하는 것은 낡은 방식이 되었다. 최근에는 지역 차원에서 형성된 산업 커먼즈가 혁신성장의 토대 역할을 하는 존재로 주목받고 있다. 이제 지방분권이나 균형발전 이슈도 혁신성장을 위한 커먼즈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지속가능한 지방자치의 기반이 마련되지 않으면 분권화는 지역 간 격차를 오히려 심화시킬 수 있다. 균형발전의 추진도 커먼즈를 형성하는 사회혁신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지역이 커먼즈를 갖지 못하면 지역개발은 부동산 거품을 낳고 지역 내의 사회적 통합성을 파괴한다.
지역 차원에서 산업이나 복지를 위한 커먼즈를 형성하려면, 일정한 통일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규모·능력·제도를 갖춰야 한다. 선진 연방제 국가들이 혁신능력이 뛰어난 것이 우연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커먼즈를 형성할 수 있는 지역 단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혁신성장의 주요한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나 독일의 주 단위 인구는 300만~500만명 정도의 규모이다. 런던광역시로의 일극 집중이 뚜렷한 영국의 경우에도 새로운 성장동력을 얻기 위한 도시연합을 추진하고 있다. 10개의 지자체가 도시연합 협상을 거쳐 출범한 광역맨체스터의 인구는 270만명이다.
우리도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진행되는 개헌 논의를 혁신성장의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 지금 당장 국가체제를 연방제로 전환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정치인들 사이의 이해관계 조정이 어려워 지방자치체계를 전면적으로 개편할 수도 없다. 그러나 광역경제권 사무를 지방자치 헌법조항에 넣는 방식으로 점진적 개선을 도모해볼 수는 있다. (후략)
이일영 한신대 교수·경제학
(경향신문 , 2017년 10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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