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렬] 세심함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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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지영 작성일18-02-06 11:24 조회39,19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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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간 유럽에서 열린 작은 회의에 참석하고 왔다. 회의 시작 전 주최 측이 참가자들에게 채식, 육식, 샐러드 중 선호하는 것을 조사하여 그 결과에 따라 음식을 제공했기에, 참가자들은 따로 부탁하거나 고민하는 수고를 하지 않고도 회의 기간 내내 편안하게 식사할 수 있었다. 참가자 스무명 중에서 채식을 선택한 사람은 여섯명이 넘었다. 주로 연구자나 사업가들로 특별한 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도 채식 선호자가 30%나 된 것이다.
참가자들과 함께 채식 식사를 하던 중에 작년에 화제가 되었던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의 오찬이 생각났다. 당시에 오찬이 사람들의 관심을 끈 이유는 어느 여당 의원이 ‘반찬 투정’을 했기 때문이다. 이때 관심의 초점은 ‘투정’이었지 음식이 아니었다. 밥과 국과 반찬 몇가지 정도면 특별히 흠잡을 게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투정’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자 대통령이 나서서 진화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나는 ‘투정’ ‘비난’ ‘진화’로 이어지는 이 장면이 어느 정도 우리 사회의 현재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때 음식에 문제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음식은 한 가지였고, 고기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참석자들 중에 채식주의자가 있었다면 밥과 나물만 먹고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청와대에서는 아무도 이런 상황을 상상하지 않았고 배려하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100명이 넘는 의원 중 어느 누구도 그 음식을 ‘부실’ 이상의 잘못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이 모두 육식주의자라 해도 우리 사회를 대변한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의원이 적어도 하나 정도는 있어야 했을 것이다.
회의에서 채식주의자에 대한 배려와 함께 또 한가지 눈에 띄었던 것은 주최 측이 회의 내내 이산화탄소 농도를 측정했고, 농도가 2000PPM이 넘으면 회의를 중단하고 창을 열어 환기하는 시간을 가진 것이었다. 이 장면을 보면서도 생각난 것이 있었다. 서울시의 미세먼지를 줄이기 위한 대중교통 무료운행 정책이었다. 그런데 대기의 미세먼지보다 더 걱정해야 할 것은 사무실, 교실, 지하철, 작업장, 지하상가의 공기질이다. 이산화탄소, 곰팡이 포자, 화학물질 농도가 높은 이 장소들은 특히 겨울철에 창을 잘 열지 않고 건조하기 때문에 공기질이 더 나빠진다.
청와대의 음식대접과 서울시의 버스, 지하철 무료운행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아직 세심함과 세밀함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끊이지 않는 재난과 사고들, 검사들에게까지 널리 퍼져있는 성추행이 모두 세심함의 부족 탓이 크고, 각종 법령과 규제가 있는데도 큰 사고가 잇달아 터지는 이유는 세밀함의 부족 때문이기도 하다. 건물 관리책임자들이 추운 겨울에 전기사용이 늘어나고 이로 인해 화재와 참사가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면, 그리고 건물 사용자들에 대한 세심함이 있었다면, 세밀하게 건물을 살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대체로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는 것 이상의 관심은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강력한 법령을 제정해서 적용한다고 해도 세밀하게 접근하지 않으면 효과를 거두기가 어렵다. 제천과 밀양에서 모두 ‘드라이비트’ 공법을 사용했다고 해서 이것을 금지하고 다른 방식으로 단열을 하도록 하면 전열기 사용은 더 늘어날 수 있다. 미국 드라이비트 회사에서 개발하여 미국 전역에 퍼뜨린 공법을 ‘부실하게’ 적용하는 것이 문제인데, 세밀한 분석 없이 ‘거칠게’ 전면금지로 나아가면 오히려 더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는 것이다. (후략)
이필렬 방송대 교수 문화교양학부
(경향신문, 2018년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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