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제] 녹색도시가 인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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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8-31 15:57 조회32,69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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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재난안전연구원은 2020년 여름 한 달간 폭염이 계속될 경우 4주째엔 1만명 이상이 죽음을 맞는다는 시나리오를 내놨다. 그중 절대다수가 환경·에너지 빈곤층에 집중될 것이다. 이런 사태는 기후변화에 따른 도시 학살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물질적 결핍만이 아니라 ‘자연녹지 결핍’ 역시 반인권적 환경이라는 사실이 이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도시 녹지공간은 단기적으론 기후변화 적응에, 장기적으론 기후변화 완화에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수풀 우거진 청산 도시에서 살 권리가 있다.
8월 한 달 동안 ‘너무 더워 못 살겠다’는 말을 골백번도 더 한 것 같다. 이제 처서도 지났으니 조금 여유를 갖고 폭염의 사회적 의미를 짚어보자. 우리에겐 두 가지 상수가 존재한다. 하나는, 기후변화가 지속되는 한 앞으로도 극단적으로 덥고 춥고 변덕스런 날씨가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 기온의 신기록 행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는, 한국에 사는 대다수 사람들은 미래에도 도시에서 거주할 것이라는 점. 국토교통부 자료를 보면 2014년 현재 용도지역 기준으로 도시 거주 인구 비율이 91.66퍼센트, 즉 4700만명 이상이 도시에서 살고 있다. 이 비율이 낮아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도시화는 수은주를 높인다. 덥다고 에어컨을 틀수록 도시는 더 뜨거워진다. 전기를 쓸수록 발전을 더 해야 한다. 발전을 더 할수록 기후변화는 심해진다. 이런 악순환이 돌고 돈다. 요컨대 기후변화와 도시화가 지속되는 한 우리는 올여름보다 더한 ‘지옥’을 매년 겪을 게 분명하다. 이렇게 본다면 전기요금 누진제 논의는 부차적인 쟁점에 불과하다. 근본 원인은 외면하면서 대증요법에 몰두하는 단견이고 미봉책이다.
아무리 기후변화가 심해져도 모든 사람이 똑같이 고생하는 건 아니다. 계층적으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제일 큰 피해를 본다. 지리적으론 저지대, 상습침수지역, 해수면 인근 지역 주민들이 제일 큰 타격을 받는다. 기후변화행동연구소에 따르면 독거노인들이 사는 쪽방촌의 평균온도가 33~34도, 심하면 38도를 넘긴다고 한다.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은 2020년 여름 한 달간 폭염이 계속될 경우 4주째엔 1만명 이상이 죽음을 맞는다는 시나리오를 내놓았다. 이때 도시지역에서만 9166명의 사망자가 나오고 그중 절대다수가 환경·에너지 빈곤층에 집중될 것이라는 계산이 당장 나온다.
이런 사태는 기후변화에 따른 도시 학살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현대 한국인들의 인권 문제 중 아주 큰 부분이 도시 인권 분야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도시 인권 정책에서 도시계획, 도시 디자인, 도시 생태계 구축이 아주 중요하다. 그렇다면 기후변화에 따른 인권침해를 줄이기 위해 도시가 취할 수 있는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단순해 보이지만 효과적인 방책이 있다. 나무 심기, 즉 녹색 청산(靑山)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이건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2014년에 만들었던 서울시민 인권헌장 31조를 보라. “서울 시민은 보다 쾌적한 환경에서 살 권리가 있다. 서울시는 적절한 녹지와 공원을 조성하여 시민들이 쾌적한 자연환경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한다.” 세계 인권도시의 모범으로 꼽히는 캐나다 몬트리올 인권헌장에도 비슷한 조항이 나온다. 최근의 연구를 보면 ‘적절한 녹지’는 단순히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한다. 도시 녹지는 두 가지 보너스, 그리고 기후변화에 대처할 수단을 제공한다. 보너스부터 살펴보자.
첫째, 나무는 건강권을 증진한다. 1984년 <사이언스>에 발표된 로저 울리크의 고전적 연구가 있다. 담낭절제수술을 받은 환자들에게 녹음 울창한 풍경이 보이는 병실을 배정해주면 회복 시간이 단축되고, 수술 후 합병증도 적었다. 그 후 여러 다른 연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오면서 수목이 인간의 신체적·정신적 손상을 복구해준다는 ‘회복적 환경’ 개념이 자리를 잡았다. 나무가 도시인의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정신적·심리적 스트레스에 대한 개인의 적응적 자원을 재생해준다는 것이다.
푸른 수풀이 사람의 스트레스와 불안, 우울을 줄이고, 혈압과 심박동을 낮추며, 근육 긴장도를 풀어주는데다 내분비계와 면역계를 활성화한다는 연구도 나와 있다. 심지어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의 억제에도 녹색 자연이 도움을 준다고 한다. 이런 효과는 잿빛 콘크리트 생활조건에서 나타나는 것과 정반대 현상이다. 최근 연구에선 도시 녹지 공간이 10퍼센트 늘어나면 평균수명 5년에 해당하는 건강증진 효과가 발생한다고 한다. 서울 시내 가로수를 열 그루당 한 그루씩만 더 심어도 누적 수명 5천만년이 증가한다는 뜻이다.
둘째, 녹지는 도시 거주민의 공감 능력을 배가하며, 인간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더 큰 세상 간의 연결성을 증대한다. 2001년 미국 일리노이대학의 프랜시스 쿠오는 녹지가 있는 도시 빈민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 주민들이 빈곤 문제에 대처하는 차이점을 조사했다. 나무가 적은 지역에 사는 사람일수록 과단성 있는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자신의 상황을 해결 불가능하다고 지레 위축되는 경향이 있었다. 즉, 녹지의 유무가 인생 역경의 대응력에 있어 큰 차이를 발생시켰다.
미국 시카고의 영세민 임대주택 단지 중 나무가 많은 곳의 주민들은 지인의 숫자, 이웃과의 유대와 일체감, 사회적 지지망 등에서 높은 수치가 나왔다. 지역사회 소속감이 늘고, 범죄율이 떨어지며, 폭력 빈도가 낮아지고, 가정폭력 비율이 줄어드는 현상도 관찰되었다. 이런 사실을 뇌신경 과학자들이 놓칠 리 없다. 자기공명영상(MRI)을 찍어보니 녹색 자연림을 응시하는 피실험자의 뇌에서 공감과 타인에 대한 사랑을 관장하는 부분이 활성화된 반면, 회색 도심의 콘크리트 건물만 바라본 사람의 뇌에선 두려움과 불안을 지배하는 부분의 활성도가 높아졌다고 한다. 물질적 결핍만이 아니라 ‘자연녹지 결핍’ 역시 반인권적 환경이라는 사실이 이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녹지 공간은 공공성의 형성에도 도움을 준다. 미국에서 20세기 초 그린벨트 운동이 벌어진 이래, 대중 공원이 많은 도시일수록 시민들의 공공성에 대한 암묵적 합의 수준이 높다는 점을 정치학자들이 발견했다.
도시 녹화에 따른 두 가지 보너스만 해도 대단한 혜택인데, 본격적인 선물, 즉 기후변화에의 대응력을 높이는 점은 근본적 차원의 혜택이 아닐 수 없다. 학계에서는 일단 어떤 지역이 행정구역상 도시로 분류되는 순간 그곳의 생태학적 영향력을 제로로 가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2011년 <응용생태학저널>에 실린 연구를 보면 인구 30만명이 사는 영국 레스터시의 개인주택 정원, 공적 공간, 도로변, 용도폐기된 산업단지 등에서 자라는 나무들의 탄소 흡수량이 무려 23만1천톤으로 조사되었다. 독일의 라이프치히시에서 행해진 탄소 발자국 연구는 도시 녹지 1헥타르당 28톤에서 218톤에 이르는 탄소가 흡수된 것으로 추산했다. 이런 효과를 전세계 차원으로 확장해본다면 도시 녹지공간이 단기적으론 기후변화 적응에, 장기적으론 기후변화 완화에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차피 인류가 앞으로도 계속 도시에서 살 운명이라면 도시를 ‘재자연화’하는 것에 우리의 미래를 걸어야 한다. 한국에서도 나무를 심어 도시 온도를 낮춘 사례가 여럿 있었다. 나무 심기가 주는 복합적인 혜택을 고려하면 도시 녹화만큼 가성비 높은 정책도 없다.(후략)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16년 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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