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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경] 삶의 등가성과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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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23 15:13 조회33,3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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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혈이라고 하면 적잖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단어일 수도 있지만, 출산을 앞두고 상당수의 부모가 제대, 즉 탯줄을 어떻게 할지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10여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탯줄에서 얻어진 혈액으로 여러 가지 난치병을 고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내 아이가 혹시라도 걸릴지 모를 질병에 대비하기 위해 수백만원의 비용을 내고서라도 제대혈을 보관하는 것이 부모 된 도리인 것으로 선전되어 왔다. 그러는 사이 일부 제대혈 은행이 과열 경쟁 끝에 문을 닫아 버리면서 기껏 큰돈을 주고 맡겨놓은 제대혈이 모두 못쓰게 되는 바람에 분노를 사기도 했고, 아이가 병에 걸려서 제대혈을 사용하려고 보니 보관 상태가 안 좋거나 제대혈 하나로는 치료제를 만들기에 분량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좌절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일각에서는 언제 쓸지, 정말 쓰게 될지도 모르는 제대혈을 고액을 주고 내 아이만을 위해 보관하는 것보다는 공익을 위해 연구용으로 기증하거나 공공제대혈은행이 맡겨 누구든 쓸 수 있게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권유하는 의견도 있었다. 이런 권유에 따라 공공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내 아이의 미래에도 도움이 되려니 하는 선한 마음으로 기증한 사람이 적지 않다. 지금 차병원 일가를 비롯하여 대통령 비리에 관련된 사람들이 맞았다는 제대혈 주사는 바로 그런 소망과 기원을 담아 기증된 제대혈일 가능성이 높다.


맞으면 젊어지고 기운이 샘솟는다는 제대혈 주사를 둘러싼 차병원의 이번 스캔들은 차움클리닉의 줄기세포제 사태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던 끝에 나온 것으로 청와대의 다른 약물 의혹과 마찬가지로 놀랍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겹기도 하다. 일반 사람들이 제대혈을 맡긴 이유는 건강한 삶을 향한 소박한 희망의 발로였을 것이다. 하지만 황우석을 비롯한 한국 생명 공학계는 이러한 희망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것도 모자라, 탯줄, 줄기세포, 난자 등 가리지 않고 좋다는 것이면 무엇이든 자신들의 불로장생을 위한 재료로 사용해왔음이 계속 드러나는 중이다.


사람마다 처지며 살아가는 형편이 크게 다르고 그 모습은 공평함과 거리가 멀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간은 누구나 유한한 삶을 산다는 것은 인간들 사이에서 평등을 상상할 수 있는 근본적인 전제가 된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도 태어나고 성장해서 나이 들고 죽는 과정을 피해갈 수 없으며, 그 삶의 과정에서 남의 수고에 빚지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몹시 건방진 인간이라고 해도 겸허함을 배워야 할 이유가 된다. 그러니 어쩌면 가진 게 너무 많은 자일수록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인간 일반의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저출산 대책이라면서 무조건 아이를 많이 낳으라던 정부의 꼬드김은 국민을 머릿수 채워주고 세금 내는 개돼지로밖에 안 보는 것이냐는 비판을 받아 왔지만, 지금 와서 보면 일반 시민들의 삶을 자신들의 복락을 위한 재료로만 삼는 것은 언제나 그들의 일관된 기조였다.(후략)



백영경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한국일보, 2016년 12월 22일)


기사 전문 http://www.hankookilbo.com/v/1a27076aa8474406b12644efc23d45a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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