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갑우] ‘리영희’를 쓰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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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8-16 13:55 조회32,15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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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가 달린 글들이 있다. 서유럽적 근대의 발명품인 각주는, 방법혁명의 한 형태다. 각주가 있는 글은 과학적 방법을 사용한 작품처럼 보인다. 이 과학적 포장의 부산물은 각주를 통해 표절을 벗어나는 것이다. 보험으로서 각주는 과학을 넘어 현학의 과시로 활용되곤 한다. 현학의 극단의 갈래들로, 각주의 동원을 통해 과학적 위장을 하거나 정치적 위험을 회피하고자 할 때, 각주는 과학적 장치이기를 멈추게 된다.
각주의 정치의 한 절정은, 특정한 글의 정전화 또는 교조화다. 우리는 특정 집단의 필자들이 공유하는 각주를 통해 어떤 글을 교조화하는 모습을 보곤 한다.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각주의 정치다. 국제정치학자로서 ‘리영희’를 써야 하는 밤, <각주의 역사>를 흘깃하며 든 생각의 파편들이다.
리영희는 어떤 이에게는 혁명적 의식전환을 선물했지만 그것이 책임임을 자성한 사상가로, 그 사상을 국제정치의 구체적 현실에 대한 구체적 분석으로 표현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던 순간들이었다. 문득 주류 국제정치학에서 리영희가 언급되지 않았고, 리영희의 작품에도 주류 국제정치학자의 이름이 없었다는 점이 각주의 정치를 보게 한 이유였다. 이 장벽은 사드 배치라는 국제정치적 쟁점을 둘러싼 국내적 갈등에서도 재연, 재현되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였다.
군사동맹과 그 동맹에 기초한 세력균형을 통해 북한 핵에 맞서 안보이익을 극대화한다는 미국식 국제정치학 교과서의 논리로 사드 도입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보며, 리영희를 또 다른 정전으로 소환하고자 했다.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 내부에서 사드 도입 결정에 대해, 전략적 모호성을 넘어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는 논리를 동원할 때, 경제위기와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극단적인 안보제일주의의 결합체인 파시즘의 전조에 대한 동의로 읽히기까지 했다.
리영희는, 국가안보에 관해 정쟁이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국가이익이나 국가안보라는 표현을 빌리는 내용과 실태를 분석해보면 그 문제와 관련된 어느 특수 개인, 또는 어느 특수 이익집단 및 세력이 드러난다.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집권세력이 내세우는 국가이성은 처음부터 이성적 토의를 그 분야에서 배제해버리려는 원리이다. 바로 이처럼 간단한 이유에서 그것은 자유와 어울릴 수 없다. 국가이성은 진리도 정의도 전제하지 않으며 오직 항복을 요구한다”(<전환시대의 논리>). 국가이익인 안보가 다양한 정치사회세력의 갈등과 협력을 통해 구성된다는 완곡한 해석으로 읽어도 좋은 구절이다. 진보세력이 놓치지 말아야 할 지점이다.
공포의 균형과 동의어인 냉전에 대한 비판도 현재적 의미가 있다. “1960년대에는 상호 저지를 토대로 한 전략적 관계의 개념이 ‘상호 확실 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로 성격지어지고, 그 머리글자를 따서 ‘MAD(광증)’로 불렸다. 냉전시대 미·소의 핵정책과 핵종교라 불릴 정도로 미국 핵에 의존적이었던 한국인의 심리에 대한 비판이었지만, “핵무기가 모든 것을 해결하고 자신(국가)의 생존을 보장한다는 환상을 토대로 한 의식은 날로 군사력 숭배 사상을 낳고 있다”(<80년대 국제정세와 한반도>)는 구절은 북한에 대한 비판으로도 손색이 없다.
“냉전용어의 관용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세계의 모든 정치적·사회과학적 사상(事象)을 흑과 백, 죽일 놈과 살릴 놈, 악과 선의 이치적(二値的) 가치관으로 판단하는 버릇이 생겼다”(<전환시대의 논리>)는 자탄도 냉전을 생산하는 심리기제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다. 이 이항대립적 심리의 전환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경제적 계산만으로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논리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후략)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정치학
(경향신문, 2016년 8월 14일)
기사 전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8142046025&code=99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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