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염무웅의 해방 70년, 문단과 문학 시대정신의 그림자](12)70년대 독재 맞선 각 계층 ‘저항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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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23 15:24 조회33,48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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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저항과 창조는 어떻게 동행하게 되었나
1970년대 이후 한국문학은 두 개의 얼굴을 갖게 되었다. 하나는 ‘저항’이라는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라는 얼굴이다. 물론 근대문학 요람기인 1920년대부터 첫 개화기인 1930년대를 거쳐 근대문학 재생기인 1960년대까지도 나름 저항과 창조는 연면하게 지속되었다. 하지만 달라진 점은 1970년대 이후에는 가장 저항적인 작가가 가장 창조적일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사실, 즉 저항과 창조의 동조화(同調化) 현상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돌이켜보면 이광수를 비롯한 일제강점기 이름난 문인들은 1930년대 후반 파시즘 체제가 강화됨에 따라 대부분 체제순응적 방향으로 기울었다. 염상섭·정지용·이태준·박태원·백석 등 예술적 수준이 높은 작가들은 정치를 괄호 안에 묶어놓고 글을 썼고, 한용운·홍명희·이육사처럼 민족의식이 투철한 문인들은 문단현장 바깥에서 활동했다. 요컨대 저항과 창조는 별개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기영·한설야·임화·김남천 등 카프 계열 작가들은 두 영역의 통일을 의식적 목표로 삼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문학이 식민지체제 한계에 ‘정치적으로’ 도전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맞은 8·15해방은 근대민족국가 수립과 근대민족문학 건설을 하나의 통일적 과업으로 추구할 기회로 주어졌다. 그러나 8·15에 이은 분단과 전쟁은 어떤 면에서는 일제강점기보다 더 열악한 상황을 초래했다. 이 참담한 시기를 대표하는 작가들, 즉 김동리·서정주 등은 큰 맥락에서는 정지용·이태준의 흐름을 잇는다고 봐야겠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친일문학의 체제순응적 자세를 계승했다고 할 수도 있다. 이 퇴행에 대한 반전의 출발이 다름 아닌 4·19혁명이었으며, 따라서 1960년대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역사적 길항과 교체가 일어난 시기였다.
■ 문학과 사회현실의 만남
식민지시대에 형성된 문학적 관습과 문단적 관행이 본격 청산된 것은 1970년대 일로서, 이때 시작된 문학과 사회현실의 역동적 상호관계는 2010년대인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다. 문학의 사회적 존재방식이 크게 변화한 것인데, 어떤 역사적·사회적 조건이 변화를 가능하게 했을까. 단적으로 말한다면 196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한 산업화의 진전이야말로 정치사회적·문화적 변화의 물적 토대이다. 한국적 사회운동의 핵심동력인 ‘민중’도 산업화 진전에 따른 농민 분해와 노동계급의 성장을 이념적으로 반영한 개념이었다. 따라서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파쇼적 억압과 민중 사이에 대결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저항의 주력부대는 노동자·학생·종교인·언론인들이었는데, 미력이지만 문인도 여기에 동참했다. 그런데 정권이 의도하지 않았던 탄압의 결과 중 하나는 저항운동 각 부문 간에 광범한 교류와 연대가 이루어진 사실이다. 대학생들이 ‘위장취업’ 형식을 빌려 산업현장으로 들어가고 도시선교·산업선교의 이름으로 교회가 노동을 조직하는 일에 나섬으로써 지식계층과 노동계급의 결합이 보편화되었다.
본업에서 쫓겨난 학생·교수·언론인들이 소규모 출판사를 차리거나 각종 문필업에 진출함으로써 문단은 다양한 직종들과 섞이게 되었다. 이제 문인들도 감옥에 다녀온 운동권 청년이나 파업노동자들과의 일상적 접촉을 통한 상호교육과 ‘의식의 확대’를 경험하는 것이 드물지 않게 되었고, 문인 자신들이 필화사건이나 반정부운동 혐의로 구속되는 수가 많았다. 노동자들의 체험적 ‘글쓰기’도 문단에 자극이 되었다. 이렇게 문학과 사회현실의 만남을 통해 축적된 저항의 정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문단에 흘러들어 문학창조의 원천이 되었다.
■ 매체 환경의 변화
이와 더불어 매체 환경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문인들의 활동무대는 주로 신문·잡지와 출판사였다. 그중에서도 ‘문장’(1939~41년)의 편집체제를 계승한 조연현 주간의 월간지 ‘현대문학’(1955년 창간)은 부동의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김동리·황순원·서정주·유치환 등이 포진한 추천위원은 수많은 신인들을 배출하여 거대한 문단세력의 바탕이 되었다.
하지만 ‘창작과비평’(창비, 1966년 창간), ‘문학과지성’(문지, 1970년 창간), ‘세계의 문학’(1976년 창간) 등 문예지들이 잇달아 창간되어 새로운 문제의식과 신선한 감각을 선보임으로써 문학활동의 중심은 점차 계간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정음사·을유문화사·학원사·삼중당·신구문화사 등 유서 깊은 출판사를 대신하여 민음사·창비·문지·한길사 같은 신흥 출판사가 두각을 나타낸 것도 지식사회에 일어난 시대전환의 일부였다. 문인들 집합장소가 명동의 다방이나 술집을 떠나 주로 청진동·무교동·관철동의 식당과 맥주집으로 옮긴 것도 한국문인협회의 퇴조와 ‘전후문학’의 종말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였다. 1974년 11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 모의가 주로 청진동 골목에서 이루어진 것은 이런 변화의 결과였다.
그런데 ‘창비’가 계간문예지의 효시는 아니다. 하지만 1958년 을유문화사에서 발행한 ‘지성’은 오래가지 못했고, ‘창비’와 비슷한 때에 창간된 현암사의 ‘한국문학’은 단명인 데다 문단 바깥에는 거의 알려지지도 못했으며, 1962~64년에 간행된 김현·김승옥 중심의 ‘산문시대’도 계간지를 꿈꾸었으나 동인지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비해 ‘창비’는 여러 면에서 한국 문예잡지의 새 역사를 썼다. 그 잡지 편집에 몸담았던 당사자가 언급하기에는 낯 뜨거운 얘기지만, 최근 50년의 한국문학사에서 ‘창비’의 위상이 막중하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일 것이다. 창간 직후 연재된 방영웅의 장편소설 <분례기>를 비롯하여 고은·신경림·조태일·김지하·송기숙·황석영·이문구·현기영 등 시대를 선도하는 다수 작가들 작품이 이 지면을 거쳤다는 것은 문예지 본분에 비추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어떤 점에서 더 획기적인 것은 리영희·송건호·강만길·박현채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성들이 1970년대 엄혹했던 시절 ‘창비’를 자신들의 거의 유일한 발언대로 삼았다는 사실, 그리고 이를 통해 민중과 지식인 사이에 강고한 저항의 연대가 이룩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 황석영 문학의 리얼리즘
1970년대를 빛낸 작가들은 한둘이 아니다. 조세희처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년) 단 한권의 업적으로 영구히 기억될 작가도 있고 이청준이나 김원일처럼 수십 년 공력을 통해 거봉(巨峰)을 이룬 작가도 있다. 황석영은 후자에 속한다. 그는 일찍이 단편 ‘입석 부근’(1962년)으로 남다른 재능을 선보였지만, 꽤 오랫동안 문학을 떠나 방황을 거듭하며 월남전 참전과 공사판 막노동을 경험했다. 단편 ‘탑’(1970년)의 당선으로 문단에 돌아온 그는 1960년대 김승옥의 감성주의와 확연히 구별되는 객관적 묘사 정신으로 민중세계의 살아있는 현실을 형상화했다. 그것은 한국 리얼리즘 문학의 승리라 할 만한 것이었다.
‘탑’은 소품에 가깝지만 황석영 문학의 좌표에서는 뜻깊은 출발의 하나이다. 이어서 그는 ‘낙타 누깔’ ‘몰개월의 새’ ‘돛’ 같은 단편과 장편 <무기의 그늘> 등 후속 작품들을 통해 좀 더 치열한 역사의식으로 월남전 경험을 형상화했다.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냉엄한 국제관계, 민족해방전쟁의 본질과 그것의 세계사적 의미, 월남군의 부패와 월남사회의 타락,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전쟁에 징발된 한국군의 모순, 그리고 전쟁이라는 것 자체의 본질적인 파괴성과 야만성을 그의 월남전 문학은 예리하게 보여주었다.
전태일의 분신사건 직후 발표된 중편 <객지>는 1970년대 노동소설의 대표작으로 각인되어 왔다. 하지만 이 작품이 쓰인 1970년대 초만 하더라도 아직 한국 자본주의는 축적 초기단계에 있었으며 계급적 노동운동 역시 제대로 된 조직을 갖기 이전이었다. 이 작품 마지막 장면에서 표명된 주인공의 결의와 다짐은 감동적이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이 객관적 사실로부터의 귀결은 아니었다. 실상 이 시대 전형적 민중상은 농민 또는 노동자로서 계급적 기반을 갖지 못한 무정형적 소외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작가는 <객지>에 이어 ‘돼지꿈’ ‘삼포 가는 길’ ‘섬섬옥수’ ‘장사의 꿈’ 같은 눈부신 걸작들을 통해 바로 이런 계급탈락자들의 생활과 감정을 뛰어난 소설적 화폭 안에 담아냄으로써 민중문학의 탁월한 전형을 창조했다.
황석영의 또 다른 문학적 관심은 중편 <한씨연대기>로 표현되었다. 여기서 작가는 남북분단 현실 속에서 참담하게 좌절해 가는 한 인간의 비극을 정면으로 다루었다. 주지하듯 분단은 우리 민족의 삶을 규정짓는 가장 핵심적인 모순이지만, 그것을 제대로 다루는 작업은 4·19혁명 이후에야 가능성이 열렸다. 최인훈의 <광장>은 본질적으로 비정치적 지향을 함축하고 있음에도 냉전시대 반공주의적 편향을 벗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분단문학의 출발점이 될 수 있었다. (후략)
염무웅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경향신문, 2016년 11월 28일)
*기획연재 전체는 다음 링크를 참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serial_list.html?s_code=af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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