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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문제는 사회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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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4-18 17:54 조회31,2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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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이 일주일 남았다. 이번 선거의 프레임은 경제다. 선거에서 야당이 경제 이슈를 들고나오는 건 드문 일이다. 그만큼 국민의 삶이 팍팍해졌다는 뜻이다. 단순히 경제성장만이 아니라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한다. 성장이라는 결과만이 아니라 목표와 과정을 중시하고, 삶의 질과 행복을 중심에 놓고 경제 시스템을 다시 짜보자는 주장이라고 이해한다. 이런 점들에 있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현재 우리가 밑바닥에 속하지 않은 지표가 드물 정도다. 복지부터 노동까지, 무엇 하나 우리가 부끄럽지 않은 항목이 있는가. 인권에서는 이런 문제를 경제적·사회적 권리(줄여서 ‘사회권’)의 틀로 해석할 수 있다. 경제민주화 이슈를 사회권과 연관해서 정리해보자.


잘 알다시피 인권에서 중요한 준거문헌을 하나만 말한다면 단연 세계인권선언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선언을 처음 읽는 사람이 흔히 놀라는 부분이 바로 22조에서 27조 사이의 사회권 조항들이다. 심지어 이것이 언제부터 선언에 들어 있었는가, 하고 묻는 이도 있다. 유엔에서 세계인권선언을 제정한 지 70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우리에겐 사회권이 인권이라는 상식적 관념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부족하다. 솔직히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이다. 유엔 사무총장이 한국인이라고 자부심을 갖고, 입만 열면 글로벌 스탠더드 운운하지만, 그 내용은 이처럼 공허하고 박약하다.


세계인권선언을 만들 때부터 자유권과 사회권이 양대 산맥으로 함께 포함되었다. 메리 앤 글렌던은 인권이라는 언어 안에 두 가지 ‘사투리’가 공존하고 있다고 비유한다. 첫째 사투리는 앵글로색슨에서 유래된 자유권이다. 또 다른 사투리는 유럽 대륙에서 발전한 사회권이다. 간혹 자유권은 서구 자본주의 진영에서, 사회권은 동구 사회주의 진영에서 선호했던 인권이라고들 한다. 냉전 시기, 양 진영이 인권을 정치화하여 분열시켰을 때엔 분명 그런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세계인권선언을 만든 1948년 시점에서는 미국과 서유럽 등 자본주의 국가들도 사회권을 적극 지지하고 승인했다. 사회권 조항을 미국 쪽에서도 찬성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때만 해도 뉴딜형 자본주의가 대세였던 점이 하나의 이유였다. 초대 유엔인권위원회 위원장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가 맡았던 점도 연관이 있었으리라.


세계인권선언 22~27조는 사회권 조항들이다. 그런데 우리에겐 사회권이 인권이라는 상식적 관념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부족하다. 유엔 사무총장이 한국인이라고 자부심을 갖고, 입만 열면 글로벌 스탠더드 운운하지만, 그 내용은 이처럼 공허하고 박약하다.


한국 실정에서 경제민주화는 사회권의 오른쪽 날개에 해당하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실행하기 위한 정치적 독트린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사회적 시장경제는 제도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 토양도 중요하다. 사회권 감수성을 키우는 것이 그 방향으로 가는 길이 될 것이다.


사회권이라는 사투리 안에 다시 두 가지 억양이 들어 있다. 첫째, 독일계 사회적 시장경제론에서 유래된 사회권 전통. 이는 가톨릭을 필두로 19세기 말부터 발전해온 기독교 사회교리 사상에서 유래되었다. 사회적 시장경제론에서는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시장경제를 옹호하지만, 경제의 일차적 목적이 맹목적 성장과 자본축적에 있지 않고 인간의 선익과 공동선을 증진하는 데 있다고 상정한다.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이유는 인간 복리를 늘리고 약자를 책임 있게 돌보기 위해 필요한 재원을 창출하는 데 있어 시장경제만큼 효율적인 체제가 없기 때문이다. 약자를 보호하는 시장의 사회적 측면은 역으로 시장경제의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 복지를 시장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투자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시장경제에서 생각하는 인권은 다음과 같다. 우선, 경제활동은 인간의 존엄이라는 대전제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덧붙여, 경제활동을 포함한 개인 선택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그리고 최선의 경제적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경제활동의 구조적 거버넌스가 갖춰져야 한다. 경제 거버넌스 없는 경제활동은 애플리케이션 없는 스마트폰과 다름없다. 또한 서로 다른 유형의 가치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예를 들어, 성과에 따른 공정한 보수라는 가치와, 재화와 서비스의 공정한 분배라는 상충하는 가치 사이에서 최대한 공약수를 추출하여 사회 구성원 간의 평화적 공존을 지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개인은 자기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타인에 대한 연대성을 유지해야 하고, 국가는 개인 위에 군림하지 말고 개인의 자기결정권을 돕는 보조성의 원리를 지켜야 한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유럽의 맥락에서 중도우파에 속하는 사상이며, 독일의 집권당인 기독민주연합의 공식 이념이기도 하다. 독일 기민련을 포함하여 범유럽 최대 정당연합인 유럽인민당(EPP)에서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세계인권선언에 나와 있는 인간 존엄, 복리, 자기결정, 자유, 책임을 지향하는 인간적 사회의 구현이라고 하는 철학의 표현이다.” 흔히 유럽의 우파 이념이 한국에 오면 좌파쯤 된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유럽과 한국의 차이는 단순히 이념 스펙트럼의 상대적 위치 혹은 제도의 차이만이 아니다. 생각의 회로와 정치문화의 바탕이 많이 다르다. 독일의 폰 바이츠제커 전 대통령이 했던 말이 있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법조항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사람들 마음속에서 자라나고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


사회적 시장경제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노동권이며 그것의 제도적 형태는 노사 공동결정제이다. 고 김종민 대구효성가톨릭대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노사 공동결정제는 의사형성 과정에서 정보접근권과 자문권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차원과, 의사결정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투표권을 행사하는 차원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노동자의 생활과 직결되는 사항, 예를 들어 “임금, 휴가, 승진, 작업시간의 장단 및 배정, 신규채용과 해고, 해고에 따른 여러 가지 부수적 조치”에 있어 노동자의 투표권을 인정한다.


사회권 내의 두 번째 억양으로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의 전통이 있다. 사회적 시장경제가 제도만큼이나 문화적이고 규범적인 태도를 중시한다면, 사민주의에서는 논리성과 제도적 구속력에 방점을 둔다. 토마스 마이어가 제시한 현대 사민주의의 네 단계 인권론은 이렇다. ①소극적 인권인 자유권은 정당하며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②그러나 적극적 인권이 제공되지 않는 체제에서 소극적 인권이 제대로 보장될 수 없다. 예를 들어, 교육을 제공하는 사회 인프라가 미흡할 때 언어와 문자를 사용한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기 어렵다. ③소극적 인권이 형식적 타당성 이상의 실질성을 가지려면 적극적 인권을 보장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 부유층이 사회적 재분배를 수용해야 한다. 이는 부유층이 재산권 행사의 자유를 포함한,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있어 약간의 침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④부의 사회적 재분배는 통상 국가의 몫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소극적 인권과 적극적 인권 간의 균형을 협상하고 이행해야 한다. 여기서 핵심은 ③번 항이다. 개별 권리, 특히 재산권이 신성불가침이므로 일점일획도 손대지 못한다고 보지 않는 것이다.(후략)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16년 4월 5일)


기사 전문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3834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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