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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경] 낙태, 생명권 대신 삶의 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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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1-02 15:35 조회30,4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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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2일 보건복지부가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비도덕적 진료 행위’로 규정하고 시술 의사의 처벌 강화를 골자로 한 의료법 개정안을 발표하면서 한국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낙태 처벌에 대한 대중적 저항이 확산하고 있다.


2009년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하는 의사와 여성들에 대한 고발로 소위 ‘낙태 정국’이 벌어졌던 이후 잠시 문제가 수면 아래로 내려갔었다. 이후 갑자기 상황이 돌변했음에도 단기간에 수많은 입장표명이 이어지고, 서명을 모으거나 대중 시위를 조직할 수 있었던 것은 꾸준히 재생산권 문제를 논의해 온 여성운동의 역량 축적, 그리고 무엇보다 최근의 페미니즘 확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정부는 시행령 철회를 거의 결정한 후에, 전문가 간담회 등의 절차를 거쳐 ‘모양새’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인 듯하지만, 어떤 명분을 내걸고 철회를 하든 실제로는 예상보다 거센 여성 대중들의 반발과 여론의 부정적 향방에 굴복한 결과임을 부정하긴 어렵다.


이번 사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이제까지 낙태 문제만 나오면 전가의 보도처럼 힘을 발휘해 온 태아의 생명권 논리가 큰 힘을 쓰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많이 행해지고 있는 임신중절을 의료인의 성범죄나, 향정신성 의약품을 복용한 상태에서의 진료나 대리진료 등 누가 봐도 명백히 해서는 안 될 의료행위와 동일 선상에 놓으려 했던 의료법 개정안의 문제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또한 저출산 현상을 국가적 위기라고 우려하면서도 보육환경, 노동조건 개선은 외면해 온 안일한 정부. 세월호 사건까지 갈 것도 없이 하루가 멀다고 들려 오는 사건 사고 희생자 소식이나 가습기 살균제 사태 등 이미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 조차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 이런 정부가 태어나지 않은 생명에 대해서만 생명존중 운운하고 나선 것에 대한 반발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본다.


실제로 낙태를 금지해서 출산을 늘려 저출산 문제를 극복하겠다는 기획을 내놓기 이전부터 한국 정부는 여성들을 아이 낳고 기르는 도구로 취급해 왔다. 저출산 대책이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을 모욕하는 일련의 사태 속에서 여성들이 느끼는 바는 과연 한국사회가 여성들을 동등한 시민으로 취급하고 있는가에 대한 강한 의혹이다. 출산을 장려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임신하는 경우에는 10대라는 이유로,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직장 생활에 충실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이주여성이라는 이유로, 임신을 빌미로 남자 발목 잡는다는 이유로 많은 임신이 사회적으로 냉대받는다. 임신과 중절을 둘러싼 과정에서 막상 공동 책임을 져야 할 남성은 책임과 처벌에서 완전히 면제되어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낙태 사실을 헤어진 배우자나 파트너에 대해서 협박을 할 빌미로까지 악용하다 법정으로 가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다. 한마디로 임신이 여성의 몸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은 국가와 남성이 여성들을 지배하고 통제할 구실이 되어, 그 결과 여성들은 한국 사회의 이등 시민이라는 분노가 지금 낙태죄의 폐지 요구를 통해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후략)



백영경 한국방송통신대 교수ㆍ문화인류학

(한국일보, 2016년 10월 20일)


기사 전문 http://www.hankookilbo.com/v/353e684369f2438197145657c16e214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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