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제] 반인권 압력단체의 흥망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1-02 15:39 조회31,044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차별금지 반대운동, 다시 말해 차별찬성 운동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은 번번이 무산되고, 지자체의 인권조례 제정 움직임도 융단폭격을 맞곤 한다. 이른바 ‘애국’을 내세우는 단체, 일부 학부모 모임, 극보수적 종교단체의 활동 때문이다.
신심 깊은 종교인이라 해서 무조건 차별에 찬성하지는 않는다. 교리상의 믿음과 세속사회에서의 민주적 원리를 분별하고, 신앙과 공적 이성 간의 긴장을 성숙하게 다룰 줄 아는 종교인들의 여러 입장들을 인권의 길로 모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면 좋겠다.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끼리 인간의 존엄성과 사랑을 지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종교 본연의 몫이지 않겠는가.
인권에 관심 있는 독자들은 이년 전 늦가을 서울시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잘 기억하실 것이다. 그 과정을 기록한 백서 <서울시민 인권헌장>(문경란·홍성수 편)을 다시 읽어 봐도 우리가 과연 법치국가인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공청회 자리는 동성애 반대단체의 ‘조직적 참여와 방해’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시민위원회는 차별금지의 인권원칙을 지켜냈지만 헌장은 끝내 공식적으로 선포되지 못했다.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차별금지 반대운동, 다시 말해 차별찬성 운동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은 번번이 무산되고, 지자체의 인권조례 제정 움직임도 융단폭격을 맞곤 한다. 이른바 ‘애국’을 내세우는 단체, 일부 학부모 모임, 극보수적 종교단체의 활동 때문이다. 반인권 압력단체가 공적 의사결정을 무력하게 만드는 현상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대응 방안을 깊이 고민해야 할 필요가 커졌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총기 규제를 둘러싼 경험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를 준다.
알다시피 미국의 총기 피해 규모는 막대하다. 2013년에 총기에 의한 타살과 자살로 총 3만3636명이 사망했다. 1968년부터 2011년까지 약 140만명이 총 때문에 죽었다. 2차대전 이후 전사한 미군의 합계가 40만명 미만임을 생각하면 실로 가공할 수준이다. 현재 약 3억 정의 총기가 일반 시민의 수중에 있다고 한다. 인구 100명당 88정의 분포,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다. 총기 사고가 터질 때마다 규탄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오바마 대통령은 14번이나 이 문제에 대해 발언을 했고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도 했다. 연방 차원에서 반자동식 총기를 포함한 공격살상용 무기를 금지시킨 법이 1994년 만들어지긴 했다. 그러나 10년 후 법을 연장해야 한다는 일몰조항 탓에 2004년에 자동폐기되고 말았다. 테러 용의자의 총기 구입 금지, 그리고 총기 구입 때 개인경력을 의무적으로 조사하게 하는 법도 막혔다. 총기를 전면 금지하자는 것도 아니고, 상식적 차원에서 규제하겠다는 것조차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흔히 미국의 독특한 ‘총기 문화’를 거론하곤 한다. 개인주의와 서부 개척사, 카우보이 신화 등이 미국인의 심성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19세기 중반부터 주로 농촌에서 총포를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쟁기와 같은 농기구처럼 취급되었다고 한다. 그 후 외국으로 무기를 수출하다가 내수시장을 개척할 방편으로 총기를 도시 소비자들의 기호품, 선망의 사치품으로 브랜드화했다는 것이다. 실생활 도구재가 문화적 소비재로 전환되었으니, 문화가 총기산업을 낳은 게 아니라 총기산업이 문화를 연출한 셈이다.
총기 보유를 미국민의 권리로 인정한 연방헌법 수정조항 2조가 총기에 대한 규제를 반대하는 근거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 조항을 자세히 보라. “기강이 확립된 주병군(州兵軍)은 자유주의 안전 보장에 필수적이므로, 인민의 무기 소지·휴대 권리가 침해될 수 없다.” 즉, 정치공동체의 집단 안보를 위한 자위책으로서의 무장권에 가깝다. 주 차원에서는 개인의 총기 획득, 판매, 소지, 운송, 사용을 규제한 곳이 많다. 이런 규제 조치에 대해 위헌소송이 수백 건이나 있었지만 대법원은 그때마다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총기 보유가 헌법적 권리이긴 하나 그것이 적절한 총기 규제와 상충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문화도 헌법도 총기 문제의 근본 원인이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인가. 바로 전미총기협회(NRA)라는 단체다. 원래 전미총기협회는 1871년 스포츠클럽으로 시작되었다. 사냥 훈련, 사격술 교습, 총기 안전교육, 자연보호 활동을 하던 비교적 ‘건전한’ 동호인 모임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지도부가 총기규제를 완고하게 반대하는 극단 노선을 취하면서 총기 관련 입법저지 로비단체의 정체성을 갖기 시작하여 현재 회원수 약 500만명에 연 예산 3억달러를 쓰는 초대형 압력단체가 되었다. 미국의 선출직 공직자들 전원을 총기에 대한 입장, 이 한 가지 기준만으로 평가하여 낙선운동을 벌인다. 현재 이 단체의 지도부는 극우파 및 총기제조업체들과 끈끈하게 유착되어 있다. 극렬 압력단체의 ‘조직적인 참여와 반대’, 이것이 정치인들이 총기규제를 강화하지 못하게 하는 근본 원인인 것이다.
미국에서 압력단체의 원조는 주점반대연맹(ASL)이다. 연맹을 이끌었던 웨인 휠러라는 변호사는 ‘압력단체’라는 용어를 만든 장본인이다. 알코올 반대, 이것 하나만 파고들어 헌법 수정조항 18조를 통과시키고 금주령 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술을 반대하기만 하면 종교인에서 케이케이케이(KKK)까지, 누구하고라도 손을 잡았다. 1903년 오하이오주 의원들 70명을 알코올 동조자로 몰아 전원 낙선시키고, 주지사 마이런 헤릭까지 찍어내기에 이르렀다. 미국 정가에선 “자칫하면 헤릭 꼴 난다”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바로 여기에 압력단체와 이익단체의 딜레마가 있다. 민주주의의 통상적 일부이긴 하나 다수 대중의 뜻을 왜곡시킬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전미총기협회를 규제할 수 있는 온갖 아이디어들이 나와 있다. 이 중 피터 드라이어 교수의 제안이 눈에 띈다. 첫째, 촛불집회, 기도모임, 탄원과 진정 등 전통적인 방식을 계속 활용한다. 당장 효과가 없어도 꾸준히 대중여론을 환기하는 것이 차별 반대의 기반을 조성하는 길이다. 둘째, 아주 중요한 국면에서는 시민적 불복종과 직접행동에 나설 수도 있다. 그리고 총기제조업체들에 대해 투자회수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대학, 종교기관, 연기금 등에서 실제로 투자를 철회하는 움직임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총기 소유자와 규제 반대론자를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 흥미롭다. 총을 갖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생각이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전체 총기 소유자 중 전미총기협회 회원은 5퍼센트 미만에 불과하다. 작년 말 나온 여론조사 하나가 눈길을 끈다. 전국의 총기 보유자 중 83퍼센트가 총기 구입 전 개인경력 조사에 찬성했다. 민주당, 공화당 지지자들 사이의 차이도 크지 않았다. 협회 내에서도 지도부의 강경노선에 반대하는 회원이 72퍼센트나 되었다. 협회의 원래 설립 취지와 동떨어진 극단적 활동에 실망하여 탈퇴하는 회원도 나오고 있다.
이런 식으로 따져보면 놀라운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모든 형태의 총기규제를 반대하는 골수 총잡이들은 전미총기협회 회원 중 4분의 1, 전체 총기 보유자 중 0.8퍼센트, 전체 국민 중 0.2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미국민 500명당 1인밖에 안 되는 극소수가 499명을 인질로 삼아 민주주의를 흔들고 있다. 요즘 ‘책임 있는 총기 보유자 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한 점을 눈여겨볼 만하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16년 10월 18일)
기사 전문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66260.html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