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염무웅의 해방 70년, 문단과 문학 시대정신의 그림자](11) 청년·민중, 그들 자신의 언어로 억눌린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23 15:22 조회33,486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ㆍ청년문화와 민중문학
이제는 기억하는 이가 별로 없겠지만, 1960년대 후반 당시의 공화당 정부는 ‘대망의 70년대’에는 ‘소비가 미덕’인 사회가 될 거라고 선전했고, 사람들은 이에 솔깃해했다. 실제로 이 무렵 경제는 고속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대도시는 화려한 외관으로 번쩍이기 시작했다. 국민들의 오랜 소망이던 절대적 빈곤의 극복이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
그러나 1970년대가 열리자마자 포장지 안에 들어있던 험상궂은 내용물이 속속 드러났다. 1970년 11월13일 청계천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분신자살했고, 1971년 8월10일에는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시)의 성난 주민 수만명이 폭동에 가까운 시위를 벌였으며, 그로부터 2주일 뒤인 8월23일에는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서 훈련받던 북파부대원 수십명이 기간병을 살해하고 섬을 탈출해 서울로 진입하다가 수류탄으로 자폭하는 사건이 터졌다. 가려져 있던 사회적 모순의 연쇄폭발에 국민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중산층의 형성과 청년문화
하지만 그럼에도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도시 중산층이 형성되고 이를 기반으로 나름의 소비문화가 성장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때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은 것은 청바지·장발·통기타·생맥주로 상징되는 이른바 ‘청년문화’였다. 물론 대학가를 중심으로 유행한 ‘청년문화’가 단순히 경박한 소비주의나 서구문화 추종에 불과하다고만 볼 수는 없었다. 우리의 청년문화도 ‘68혁명’으로 표출된 유럽 젊은 세대의 기성체제 전복운동이나 미국 반전·민권운동 세대의 다양한 반(反)문화적 행태에 어떤 방식으로든 닿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한국은 대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농경사회의 풍경과 정서가 남아있는 반(半)자본주의 국가였다. 게다가 대학 운동권에서는 식민사관의 극복을 지향하는 민족주의가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당시의 신문을 보더라도 청년문화를 둘러싼 지적 환경이 우호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경향신문 1974년 5월7일자 문화면은 ‘청년문화 오도되고 있다’는 표제 밑에 고대(高大)신문의 논설과 경희대 학술행사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대학가에 일고 있는 일부 소비적·향락적 풍조에 대한 지식인의 비판적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또 같은 기사에서 전하는, 고려대 청년문제연구회 주최의 심포지엄은 제목부터가 ‘청년문화의 본질과 그 변질’이어서 주최 측의 의도를 짐작하게 한다. 전혀 다른 맥락이지만, 당시 박정희 정부도 서구 청년문화에 스며 있는 저항적 요소의 국내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장발 단속, ‘퇴폐가요’ 금지 따위의 강압책을 썼다. 하지만 이런 비판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생활문화가 ‘서구적’ 외양을 닮아가는 추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 시대 문학의 한 축을 담당했던 ‘70년대 작가’는 이런 복합적 문화환경의 산물이었다.
■‘70년대 작가’들의 빛과 그늘
‘70년대 작가’란 말은 사실 막연한 용어이다. 1970년대에 등단한 작가란 뜻인지, 1970년대에 주로 활동한 작가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은 채 언론에서 애용되었다. 당시 신문과 잡지를 보면 최인호를 필두로 조해일·조선작·김주영·한수산 등이 주로 여기 포함되는데, 이들은 1970년대 들어 정비석·유주현·박경리·이호철 등 선배들을 제치고 당대 최고의 문학시장인 신문 연재소설에서 주역을 차지함으로써 주목할 만한 하나의 ‘문학현상’으로 거론되었다.
그들의 소설은 ‘김승옥 이후 세대’의 작품답게 섬세한 문체와 도시적인 감각으로 젊은 독자들의 새로운 취향에 부응했다. 뿐만 아니라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 조해일의 <겨울 여자>,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 한수산의 <부초>가 잇달아 영화로 제작돼 많은 관객을 모음으로써 그들의 작품은 유신체제의 억압적 상황으로부터의 탈주를 꿈꾸는 대중들에게 환상의 피난처를 제공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업적 성공은 반대급부를 요구했다. 그것은 ‘인기작가’들에게 어쩔 수 없이 나타나게 마련인 문학의 통속화 경향 및 이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었다. 예를 들면 경향신문 1978년 8월9일자 ‘문단산책’은 “이른바 70년대 작가에 대한 비판이 요즘 유행병처럼 문단을 휩쓸고 있다”고 말을 꺼낸 다음 “70년대 작가들의 작품이 지나치게 대중에게 영합, 퇴폐적이고 선정적인 데만 치우쳐 올바른 문학세계를 외면하고 있다”는 어느 평론가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다.
이런 비판은 얼마간 정당한 것이지만, 동시에 얼마간 부당한 것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이광수 이후의 한국 근대소설사에서 대부분의 장편소설은 신문 연재소설이었고, 따라서 그 대부분은 통속성과의 타협을 피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다수 독자가 재미있게 읽도록 하는 요소를 통속성 내지 대중성이라 규정한다면, 그 자체는 오히려 장편소설이 구비해야 할 요소의 하나이지 배척해야 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어떻든 최인호·조해일·조선작·한수산 등이 특정 시점에서 ‘70년대 작가’로 묶여 거론된 것은 그들의 불운이었다. 실상 그들은 문학적 체질도 각각 다르고 이후의 작가적 행보에서도 구별된다.
‘70년대 작가’의 대표라 할 최인호에 대해서만 거칠게 살펴보면, <견습환자> <술꾼> <타인의 방> 같은 초기 단편소설은 대중적이라기보다 ‘실존주의적’이라는 평을 들을 만한 것이었고, 1980년대 이후 그의 문학적 발걸음은 감성적인 문체를 유지하면서도 ‘70년대적인’ 세계를 떠나 역사 또는 종교 같은 거시적인 세계로 향했다고 할 수 있다.
■‘민중문학’의 탄생
청년문화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소개한 경향신문 기사(1974년 5월7일) 바로 밑에는, 한용운 선생 30주기를 맞아 제정된 만해문학상 제1회 수상자에 시집 <농무>의 신경림이 선정돼 6월10일 시상식이 거행된다는 또 다른 기사가 시인의 젊은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박경리의 <토지>,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과 경합 끝에 결정되었다든지 상금이 30만원이라는 내용도 흥미롭지만, 다음과 같은 신경림의 수상소감이야말로 주목에 값한다. “혼자만 아는 관념의 유희, 그 말장난으로 이루어진 시에 대한 반발로서 더욱 대중의 언어로 대중의 생각을 끄는 것이 내가 주로 생각하고 있는 시.”
이와 같은 시인의 발언은 “문학에서도 결국은 물고기가 바다에 의존하듯 민중의 삶에 스스로를 의탁하는 작가와 작품이 끈덕지게 살아남아 승리하리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라는 시집 발문에서의 백낙청 서울대 교수의 언명과 더불어 1970년대 한국문학의 물줄기를 바꾸어놓는 기폭제가 됐다. 민중이란 어떤 존재이고 문학이 민중의 삶에 기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따지는 것은 물론 단순치 않은 이론적 숙고를 요한다. 어떻든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자로서의 개인적 경험을 근거로 말한다면 이 잡지 1970년 가을호를 위해 신경림의 ‘눈길’ 등 5편의 시와 1971년 봄호를 위해 황석영의 중편소설 <객지>를 원고로 읽었을 때 엄습한, ‘민중문학’의 실체에 직접 맞닥뜨렸다는 생생한 실감을 메마른 개념적 어휘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민중문학 탄생의 현장에 최초의 목격자로 참가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감격이 너무 컸던 것이다. (후략)
염무웅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경향신문, 2016년 10월 30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