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 세월호의 선생님들, 적폐청산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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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04-25 14:27 조회35,39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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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청산’은 촛불시민혁명의 으뜸가는 구호이지만, ‘박근혜 퇴진’처럼 명확한 단일 과제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해결할 복잡한 정치적 과제를 제시하는 퍽 어려운 슬로건이다. 하지만 쌓이고 쌓인 악폐를 깨끗이 씻어버리자는 네 글자는 박근혜 정권의 헌정파괴에 공분한 전국의 각계각층 시민들이 너나없이 한마음으로 내세운 것이다. 동시에 우리 역사에 깊이 박힌 폐습이 일회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냉철한 인식을 깔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복합적인 슬로건에는 오해나 왜곡 등 쉽지 않은 문제들도 생긴다. 정당한 구호를 먹칠하려는 악의적인 시도 역시 끼어들게 마련이다. ‘청산’은 일상대화에서 부도난 회사의 자산 정리나 가까운 인간관계의 파탄 등 부정적 맥락에서 쓰이는 수도 많다. 국정농단 세력은 이런 미묘한 어감을 잘도 파고들어 정권교체 후에 무차별적 숙청작업이 벌어질 것처럼 과장한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들은 당연히 적폐청산을 약속하고 있지만, 그들의 공약이 정말 적폐청산을 이룰 만큼 탄탄한 실행계획까지 마련했는지 여부는 조기 대선 일정의 어려움을 감안해도 의문이 많다. 설령 민주진영의 역량이 뛰어나더라도 적폐가 손쉽게 말끔히 청산되는 일은 역사적으로 드물다. 민주세력도 역사의 산물로서 현실적 조건에 구속되며, 그 안에 적폐의 요소가 없을 수 없다. 국민들이 적폐세력 일소를 외치는 야당들에 의구심을 품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 속에 도사린 적폐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적폐청산이 새 시대의 구호로 살아 숨쉬자면 새 정권의 구체적 개혁 프로그램으로 구현되어 국민적 지지를 넓혀가야 한다. 아니면 우리는 촛불집회와 탄핵반대집회를 선악 대결로 단순하게 바라보는 나태함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광화문 촛불집회와 대한문 탄핵반대집회를 갈라놓은 경찰 차벽 사이의 텅 빈 공간은 촛불시민 누구에게나 당혹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러나 그 공간이 날카롭게 드러낸 분열과 적대, 무지와 몰이해의 극복이 꼭 필요하다는 실감도 못지않게 강렬한 것이었다. 적폐청산에 쉽게 동의하지 않는 유권자가 곧 적폐세력은 아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올바른 해결은 적폐청산의 실질적 내용을 채우기 위해 긴요하다. 이제 막 미수습자 수색이 시작되었고, 사고 원인 규명을 위한 선체조사도 마찬가지이다. 아직 우리는 참사의 진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며,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해결할 과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적폐 중의 적폐인 비정규직 차별도 그 과제에 속한다.
지난 14일 국가인권위원회는 단원고의 기간제 교사 김초원·이지혜 선생님을 순직 처리하라는 뒤늦은 권고를 내놓았다. 이들은 급박한 상황에서 탈출이 쉬운 5층에서 4층으로 내려가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벗어주는 등 애를 쓰다가 결국 4층에서 시신으로 인양되었다. 누가 봐도 공무수행 중에 생명을 바친 일이며 그들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순직 처리가 옳다. 그러나 인사혁신처는 이들을 순직 처리하면 약 4만6000명의 전국의 기간제 교사를 모두 공무원으로 인정하게 되어 부담이 크기 때문에 국회의 특별법 제정이 유일한 해법이라는 입장이라고 한다.
특별법이 아닌 더 나은 길이 과연 없을까? 두 분 선생님과 동일한 경우에 순직 처리를 보장할 법과 제도의 개선을 부당한 비정규직 차별을 극복하는 출발점으로 삼는 정공법을 택해야 한다. 무분별한 비정규직 양산과 부당한 차별은 온갖 사회적 불안과 적대감, 눈먼 무한경쟁, 냉소와 체념의 근원이 되는 심각한 적폐이다. 노동운동 일각에서 내세운 ‘비정규직 없는 사회’는 비현실적이지만 ‘비정규직이 억울하지 않은 사회’는 얼마든지 가능하며 마땅히 그 길로 나아가야 한다. 경제학자인 고 김기원 교수가 남긴 말이다.
두 선생님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 바로 그 길로 가는 첫걸음이어야 한다. 더구나 이들은 정규직과 똑같이 전일제 근무를 했으며 원래 기간제 교사는 하지 못하는 담임까지 맡고 있지 않았던가. 교육이라는 공공 부문부터 비정규직 차별을 방치한다면 적폐청산은 공염불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단숨에 건설할 수는 없지만, 큰 방향만은 분명히 잡아야 한다. (후략)
김명환 서울대 교수
(경향신문, 2017년 4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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