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병직]진짜와 가짜, 두 개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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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3-10-06 16:51 조회2,79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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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라는 외래어 하나가
진실과 거짓 좌우 못해
팩트 자체가
허위가 되고 진실이 된다
자기가 외면하는 사회 풍조가
가짜 뉴스를 양산
‘사실’ 대신 ‘팩트’라는 단어가 난무한다. 사건은 사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데, 사실은 뭔가 불분명하고 부족하다고 느낀다. 팩트의 우리말이 사실이고 사실이 사실일 때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어느 순간 거짓에 오염되기 쉬운 뉘앙스를 풍기는 말로 치부되었다. 사건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건을 이루는 요소를 분리하여 파악하면 된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 요소에 거짓이라는 불순물이 묻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다시 환원하면 진실한 사건이 된다는 생각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서 재미있는 비유적 표현을 보여준다. 글을 쓸 때는 있는 그대로 써야 진실이 된다. 예를 들어 “할머니는 마녀를 닮았다”라고 하면 안 되고, “사람들은 할머니를 마녀라 부른다”라고 써야 한다. 흔히 의견이냐 사실이냐로 편하게 구분하는 방식이다. 마찬가지로 “당번병은 친절하다”는 곤란하고, “당번병은 우리에게 이불을 가져다 주었다”는 허용된다.
팩트든 뭐든 기본 구성 요소부터 점검하면 거짓이나 허위를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은 원칙적인 것 같으면서도 순진하여 기대가능성이 낮다. 뉴스는 문장으로 구성된다. 문장을 이루는 어휘들이 진짜라고 뉴스의 진실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어휘의 조합과 구성을 시작하는 순간 의미를 향해 달려간다. 뉴스가 되려면 처음부터 의도한 의미가 전제돼야 한다. 뉴스 중 일부가 재구성되어 역사의 한 줄로 바뀐다. 의도와 구성에 의사가 개재되었다고 순수하지 않은 것으로 단정할 수 없고, 그 문장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가짜라고 판단할 수 없다. 팩트만 나열하면 뉴스도 역사도 되지 못한다.
보이는 어휘와 보이지 않는 의미가 뒤섞여 문장과 뉴스와 역사가 된다. 거기에 해석이라는 작용까지 덧붙여지면 양상은 더 복잡해진다.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로 끝나지 않는다. 어느 할머니를 지칭하며, 마녀의 의미는 무엇이며, 몇 사람이나 그런 말을 했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진다. 당번병이 이불을 던지고 갔는지 웃으며 펴 주었는지 세탁된 이불이었는지 더러운 것이었는지 모른다.
10여 년 전 광화문을 달군 촛불집회에서 전경 버스에 불을 붙이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보도되었다. 역사학자 한 사람이 사석에서 테러나 다름없는 위험한 행동으로 변질된 집회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맞은편에 앉았던 법률가는 다른 의문을 품고 구치소에 접견을 갔다. 대학을 졸업한 시골 출신의 청년은 공장에 다니다 실직했다. 마침 집회가 시작되자 호기심에 참가했고, 저녁마다 광화문은 출근지가 되었다. 달을 넘기면서 열기가 가라앉자 청년도 따라서 시들해졌다. 어느 날 밤 버스 아래로 들어가 연료탱크를 만지작거리다가, 시위대가 남긴 양초를 긁어모은 다음 손바닥만 한 모닥불을 지폈다. 날아다니는 전단을 몇 장 모아 그 위에 올렸다. 집회를 주관했던 연대회의 책임자가 지나가다 수상한 행동으로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
청년이 테러리스트였는지 프락치였는지 성냥팔이 소년이었는지 누가 어떻게 판단하겠는가? 지금은 ‘경찰차 방화미수’라는 제목의 기사와 군더더기 없는 유죄 판결문만 남아 있다. 미시사가든 민중사가든 훗날 필요하면 그 종잇조각들을 1차 사료로 사용할 것이다.
팩트라는 외래어 하나가 진실과 거짓을 좌우하지는 못한다. 팩트 자체가 허위가 되고 진실이 된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고, 그렇게 해석하고, 그렇게 규정한다. 자기가 선택하는 것 외에는 외면하는 사회 풍조가 가짜 뉴스를 양산한다.
감시의 눈이 정권을 흔들기 위해서 퍼뜨리는 가짜 뉴스가 있는가 하면, 정부가 정권의 안정과 유지를 위해 만드는 가짜 뉴스가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후자가 전자보다 위험하다.
차병직 변호사 (법무법인 한결·법률신문 편집인)
법률신문 2023년 9월 28일
https://www.lawtimes.co.kr/opinion/191632?serial=19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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