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염무웅의 해방 70년, 문단과 문학 시대정신의 그림자](4) 남과 북 사이 ‘선택’ 내몰린 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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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6-02 16:54 조회31,07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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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4 6·25의 참화, 그때 문학은 어디 있었나
김구 선생을 비롯한 애국자들이 분단 정권 수립을 반대한 까닭은 남북 간 전쟁의 위험 때문이었다. 그러나 6·25 남침이 시작된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은 “설마 전면전으로야 번지겠나” 하고 안이하게 생각했다. 문인들도 대부분 그랬다. 하지만 그날 저녁 무렵 이미 서울 청량리 유진오의 집에서는 멀리 동북쪽으로부터 포성이 울려왔다. 그는 불안과 궁금증으로 밤늦도록 라디오 앞에 앉아 있었으나, 자정 무렵 국방장관 신성모의 짤막한 연설 외에는 뉴스도 해설도 없었다. 26일 아침, 청량리 네거리는 벌써 피란민들로 떠들썩했다. 오후 시내로 나가자 종각 옆에는 ‘개성은 완전 포기, 임진강으로 후퇴’라는 벽보가 나붙어 있었다. 밤이 되자 포성은 더 가까워진 듯했다. 그런데도 라디오는 적군이 후퇴 중이라는 엉뚱한 소리를 전했다.
■북한군 점령하자 우익 문인들 지하로
27일 새벽, 라디오에서는 “정부를 수원으로 옮긴다”는 요지의 공보처 발표가 흘러나왔다. 소스라쳐 놀란 유진오는 피신을 결심하고 간단한 가방을 꾸린 다음 아내와 여섯 아이들을 두 패로 나누어 시내 모처로 가도록 지시하고 혼자 길을 나섰다. 거리는 인산인해였고, 교통편은 끊어진 데다 정부기관들은 가는 곳마다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여기저기 헛걸음 끝에 간신히 군용차를 얻어 타고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 철교 위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폭파작업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임을 그때 그는 알 리가 없었다.
노량진에는 누이네 집이 있어 그는 우선 그리로 들어갔다. 밤늦어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큰길로는 군용차들이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남쪽으로 달리는데, 시내의 포성은 빗소리를 뚫고 점점 더 가까워졌다. 자정도 지난 한밤중 엄청난 폭음과 함께 벽과 기둥이 통째로 흔들렸다. 바로 한강교 폭파였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유진오는 28일 새벽 남부여대(男負女戴)한 피란민들 틈에 섞여 가까스로 수원에 도착했고, 거기서 차편을 얻어 결국 부산까지 내려갔다.
다른 한편, 26일 남대문로 문예사 사무실에서는 긴급 문총(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상임위원회가 열려 대책을 논의한 끝에 ‘비상국민선전대’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국방부 정훈국의 권유에 따라 중앙방송을 통해 회장 고희동(1886~1965)과 모윤숙은 강연을 하고, 김윤성과 공중인은 시를 낭송했다. 이 녹음방송은 북한군이 쳐들어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27일 저녁 급박한 시간에 한강을 건너는데 성공한 조지훈·서정주·김송·이한직·박목월 등은 28일 수원에 모여 정훈국과의 협조 아래 ‘문총구국대’를 결성하고 종군활동을 개시했다.
하지만 이처럼 남행에 성공한 것은 드문 행운이었고, 대다수 문인들은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사이에 28일의 북한군 서울 점령 사태를 맞았다. 박종화·모윤숙·김동리·조연현 같은 대표적 우익 문인들은 지하로 숨어 석 달을 지내다가 겨우 목숨을 건졌다. 김동리는 밖에 나왔다가 검문에 걸렸으나 호적 이름이 ‘김창귀’여서 구사일생 살았고, 조연현은 수복 당일 국군에게 빨갱이 은신자로 오인되어 큰일 날 뻔했으나 6·25 직전 발간된 ‘문예’지에 실린 초상화가 신분증 노릇을 한 덕에 화를 면했다.
백철·최정희·박태원 등 다수 문인들은 부득이 종로 한청빌딩에 마련된 문학가동맹 사무실로 나갔다. 거기에는 해방 직후 월북한 이태준·임화·안회남·김남천·허준·이원조·김사량 등이 종군작가 형식으로 내려와 있었다. 그들은 지금 서로 상반된 처지에 놓여 있지만 일제 때부터 가깝게 지내던 동료들이었다.
그들의 만남은 우리 문단사상 가장 쓰라린 장면이었을 것이다. 백철 등은 사무실에 앉아서 부르주아 사상의 청산을 위한 날선 강연을 듣고 초등학생처럼 북쪽 선전가곡을 배운 다음 때로는 시가행진에도 동원되었다. 김기림 같은 사람은 무슨 연유인지 그쪽 정치보위부로 끌려갔다. 김기림을 구해달라는 백철과 박태원의 간청에 임화는 힘없는 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어느 날 허준이 안암동 백철의 집으로 찾아와 하룻밤 자고 갔다. 월북 전 허준도 백철의 집 근처 안암동에 살았던 것이다. 백철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허준은 속에 있는 얘기를 털어놓았다. “백형에게나 하는 말이지만 하여튼 난장판이오. 더구나 문학다운 것은 할 생각도 말아야 해요!”
가장 참혹한 경우는 김팔봉이었다. 그는 27일 밤까지만 해도 태연했었다. 국군이 설마 1주일은 버티겠지 하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28일 이른 아침 그는 북한군 탱크부대가 집 앞으로 행진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사흘 동안 멍하니 유리창 밖만 내다보며 지냈다. 그러다가 7월1일 밤 보안대원에게 연행되어 밤새 조사를 받고 2일 대낮 지금의 서울시의회 광장에서 수백 명의 구경꾼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소위 인민재판을 받았다. 형식적 재판 끝에 사형을 언도받은 그는 몽둥이에 골통을 얻어맞고 분수처럼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그러고는 의식을 잃었는데, 깨어난 것은 7월6일 오후 동대문서 유치장에서였다. 어쨌든 살아난 것이었다.
■도강파와 잔류파로 나뉘었던 문단
9·28수복부터 1·4후퇴 사이에는 또 다른 참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민들을 팽개치고 도망쳤던 정부는 환도 후 고생한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위로하기는커녕 부역자 처벌이라는 이름으로 잡아들여 온갖 악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박완서의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5)에는 그 고통의 시간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박완서의 고교 국어교사이자 소설가인 박노갑(1905~51)과 점령 기간 인민군에게 밥해 주는 것으로 근근이 먹고살았던 박완서의 숙부도 약식재판을 거쳐 처형되었다. 문단 전체로서도 도강파(渡江派)와 잔류파로 나뉘어 살벌한 중상모략을 주고받았다. 조연현은 <내가 살아온 한국문단>(1977)이라는 회고록에서 합동수사본부의 부역문화인 심사에 자신이 문총 대표로 파견되어 잔류문인의 변호에 적극 나섰다고 증언한 바 있다.
염무웅 |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경향신문, 2016년 4월 25일)
기사 전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4252221005&code=2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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