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염무웅의 해방 70년, 문단과 문학 시대정신의 그림자](6) 이승만 몰아낸 혁명의 불꽃, 한국문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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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6-24 18:02 조회30,43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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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6 4·19혁명과 한국문학
6·25전쟁 전후의 가혹한 시기를 통과하는 동안 우리 문단은 이 나라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온통 쑥대밭이 되었다. 이것은 과거 카프나 문학가동맹 소속 좌파문인들이 사라지고 그들의 작품을 못 읽게 된 사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사회에서라면 좌·우의 구분은 작품적 결과에 따라 사후적으로 판정될 수 있는 것들 중 하나일 뿐이고, 정말 중요한 것은 이념의 차이를 넘어선 자유의 공간 속에 작가들 나름의 최선의 역량이 어떻게 최대한 작품으로 구현되었느냐의 여부일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 집권 12년은 염상섭·정지용 같은 중도적 문인들조차 비명에 가게 만들거나 활동을 위축시켰다. 권력욕에 비해 정권의 기반이 취약한 데다 무능하고 부패했으므로 체제 유지에 외세 의존과 이념적 강압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던 것이 이승만 시대였다. 문학적으로도 이태준·한설야·이효석·박태원, 정지용·임화·김기림·백석, 최재서·백철·이원조가 두루 활약한 1930년대에 비해 김동리·황순원·유치환·서정주·조연현의 1950년대는 손창섭·장용학·김춘수 세대를 보탠다 하더라도 다양성과 깊이에 있어 현저히 퇴보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억압과 빈곤의 상황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것은 4·19혁명이었다.
한마디로 4·19는 8·15에 버금가는 해방의 감격을 선사했고, 3·1운동이나 6월항쟁에 비견되는 전환의 역사성을 이룩했다. 뿐만 아니라 4·19는 좌절감 속에 살아가던 개인들의 내면세계에도 중대한 혁신을 가져왔다. 무엇보다 4·19는 8·15와 달리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라는 성취감을 민중들에게 안겨주었고, 그런 점에서 남한 민주화운동의 진정한 출발점이 되었다.
■조지훈과 신동문의 비판정신
흔히 4·19를 ‘미완의 혁명’이라고 말한다. 옳은 지적이다. 세계사의 다른 모든 혁명들이 그랬듯이 4·19는 ‘미흡한’ 그리고 5·16에 의해 ‘역전된’ 혁명이다. 그러나 1960년 3월15일부터 서너 달 동안의 신문을 훑어보면 70여년 대한민국 역사에서 혁명이 실제 상황으로 전개된 것은 그때뿐이 아니었나 생각되기도 한다. 물론 4·19 이후의 현실정치 자체는 혁명의 퇴행과 목표의 변질, 타협과 배반의 연속이었다. 즉 기득권 세력에 의한 선수교체만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4·19가 점화한 이상은 사회 각 분야에 스며들어 새로운 변화의 불씨를 만들었다. 문학에도 당연히 새 바람이 불어왔다.
이승만 정권이 3·15 부정선거를 획책하고 일부 문인과 예술인들이 ‘인간 이기붕’을 찬양하는 문필과 행사에 동원되고 있을 때[이기붕의 호를 따서 그들을 ‘만송족(晩松族)’이라 부른 것은 시인 신동문이었다(경향신문 1960년 10월8일자 4면 기사 참조)], 지식인의 이런 타락한 행태에 대해 앞장서 비판의 목소리를 낸 사람은 조지훈이었다. 이 무렵 그는 ‘선비의 길’에 관해 여러 편의 글을 썼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지조론’이다.
그는 이 글에서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가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가 없다”고 전제하면서 “양가(良家)의 부녀자가 놀아나고 학자 문인까지 지조를 헌신짝같이 아는” 세태를 준엄하게 규탄했다. 이 논설은 1960년 2월15일 쓰여져 월간지 ‘새벽’ 3월호에 발표되었다. 이어서 4월13일에는 박목월·박남수·이한직과 합동으로 연작시를 써 역시 ‘새벽’ 5월호에 발표했다. “머리 위엔 푸른/ 하늘이 있어도/ 솟구칠 수가 없구나/ 민주주의여!”라고 비통하게 외친 시 ‘터져오르는 함성’은 그 연작시의 마지막 장이다.
4·19 직후에는 박두진·박목월·이한직·박남수 등과 함께 새벽사에서 주최한 좌담에 참석해 혁명에 대해 논했다. ‘선비의 직언-격동기 지성인의 사명’ ‘4월혁명에 부치는 글-불의를 고발한 학생들에게’ 같은 논설문도 그 무렵 ‘새벽’ 지면을 장식한 글이다. ‘혁명’이라는 작품은 1960년 4월26일 밤 경향신문 복간에 즈음하여 축시(祝詩)로 청탁받아 썼다고 하나, 막상 경향신문 지면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어떻든 조지훈은 자기 나름의 긴박한 호흡으로 혁명의 진행과 보조를 같이하고 있었다.
4·19에 몸을 던진 또 한 사람의 시인은 신동문이다. 서울에서 데모가 일어나고 그 여파가 지방으로 미쳐 청주에서도 학생데모가 일어나자, 평소 비판적인 논설을 ‘충북신보’ 등에 발표해오던 그는 배후인물로 경찰에 쫓기게 되고, 그리하여 야간열차로 도망치듯 서울에 온다. 상경 직후 그가 마주친 것은 시위 현장이었다. 수만명의 시위대가 종로와 광화문을 가득 메웠고, 일부는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를 향해 돌진했다. 신동문은 곧장 이 대열에 참가했다. 그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을 보았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하숙으로 돌아와 방바닥에 엎드려 쓴 시가 유명한 ‘아! 신화같이 다비데군들’이다. 이렇게 활동무대를 서울로 옮긴 신동문은 최근 작고한 김재순(전 국회의장)의 권유로 새벽사에 편집장으로 취직했다.
‘새벽’이란 잡지에 대해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 내 곁에는 우연히 1959년 10월호가 꽂혀 있다. 판권을 보니 사장 장이욱, 주간 김재순, 편집인 겸 발행인 주요한으로 되어 있다. 이 명단만 보고도 잡지의 성향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데, 간단히 말해 도산 안창호 선생을 따르는 평안도 출신 흥사단 계열이 주축이다.
주요한은 근대문학 초기 ‘창조’의 동인이자 ‘불놀이’의 시인 바로 그 사람으로, 경향신문 폐간의 도화선이 되었던 ‘여적’(1959년 2월4일)의 필자였다.
‘새벽’은 1954년 8월 창간되었다고 하나 널리 읽히는 잡지가 아니었는데, 1959년 10월 “독자 제현과 더불어 시대적 호흡을 같이하겠다”고 다짐하며 혁신호를 발행했다. 함석헌 선생의 권두논문 ‘때는 다가오고 있다’를 앞세운 다음, ‘정권교체는 가능한가’라는 도전적인 제목의 특집으로 이승만 정부와의 정면 대결에 나섰던 것이다. 박남수의 시와 선우휘·오상원의 단편소설을 실어 문학에도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 조지훈의 시와 산문을 연거푸 실었던 것도 당시 ‘새벽’의 비판적 노선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잡지는 편집장 신동문의 노력으로 최인훈의 장편소설 <광장>을 게재하는 등 한때 ‘사상계’를 넘보는 위치까지 올라갔으나, 주요한과 김재순이 4·19 이후 구성된 민주당 장면 정부에 입각하면서 12월호를 마지막으로 간판을 내린다.
■시를 빌려 4·19혁명으로 들어간 김수영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시인 김수영의 4·19는 감격이고 환희였다. 또한 해방이고 자유였다. 그는 하루 종일 시위대열을 따라다니다 저녁에는 노모가 사는 도봉산 밑으로 갔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4월26일 이승만의 하야 소식을 듣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꿈이 현실로 화하는 기적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6·25 때 서울에 남았다가 문학가동맹 사무실에도 나갔고 그러는 사이 북쪽 의용군에 동원되었다가 탈출, 이번에는 남쪽 경찰에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바 있었다. 이 경험은 생활에서나 문학에서나 넘지 못할 트라우마가 되어 그의 감정과 사유를 가로막았다. 따라서 ‘책형대( 刑臺)에 걸린 시’(경향신문 1960년 5월20일)라는 에세이에서의 그의 고백은 결코 한갓 푸념이 아니다.
“나처럼 6·25 때 포로생활까지 하고 나온 사람은 슬프게도 문학단체 같은 데서 떨어져서 초연하게 살 수 있는 자유가 도저히 없었다. 감정의 자유 역시 그렇다. (…)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작품이 무슨 신통한 것이 있겠는가. 저주가 아니면 비명이 아니면 죽음의 시가 고작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 그 모든 압박과 설움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현실 속에서 열린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같은 에세이에서 이렇게도 썼다. “나는 정말 이 벅찬 자유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 눈이 부시다. 너무나 휘황하다. 그리고 이 빛에 눈과 몸과 마음이 익숙해지기까지는 잠시 시를 쓸 생각을 버려야겠다.”
그러나 김수영은 시를 버리지 않았을뿐더러 더 열렬하게 시의 형식을 빌린 혁명 속으로 들어갔다. 이 무렵부터 그의 시에는 항상 창작 날짜가 기록되어 있는데, 혁명의 기운이 바야흐로 무르익던 4월3일에는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다/ 민주주의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도 민주주의식으로 싸워야 한다”(시 ‘하…그림자가 없다’)고 예감에 차서 노래했다. 이승만의 하야가 알려진 4월26일 아침에는 격정에 넘쳐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시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고 외쳤다. 6월15일이 되자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시 ‘푸른 하늘을’) 하고 한걸음 물러서 사색의 언어를 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떻든 분명한 것은 4·19를 거치면서 김수영의 문학과 인간에는 전면적이고도 총체적인 비약이 일어났다는 것이고 그 자신 온몸으로 그 점을 자각했다는 것인데, 사소한 예지만 7월28일 밤 그는 마루에서 거미를 잡는 아내에게 이렇게 소리 지른다.
“야 고만 죽여라 고만 죽여/ 나는 오늘 아침에 서약한 게 있다니까/ 남편은 어제의 남편이 아니라니까/ 정말 어제의 네 남편이 아니라니까”(시 ‘거미잡이’)
어쩌면 혁명은 가장 보잘것없는 피상적 일상사부터 가장 내밀한 감성의 구조까지 모든 것이 쇄신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김수영의 시의 발걸음은 혁명의 성취와 좌절이 기록된 시대의 감광판이다.
■이어령과 4·19 시대 - 젊은층 목소리 대변 ‘이승만 체제’ 종말 예고
4·19혁명의 전환적 의미를 생각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인물은 평론가 이어령(사진)이다. 그는 거의 ‘국민적 유명인사’이므로 새삼스러운 소개가 필요 없지만, 그럼에도 문학사적 위상은 역할의 중요성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이어령은 대학을 졸업하던 1956년 ‘우상의 파괴’라는 글을 한국일보에 발표한다. 주류문단의 가식적 행태를 혹독하게 비판한 글이었다. 이 글로 그는 하루아침에 젊은 세대의 기수로 떠올랐다. 이후 1960년대 초까지 화려한 수사와 세련된 감각의 이어령 평론들은 신문과 잡지마다 가장 탐내는 품목이 되었다.
염무웅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경향신문, 2016년 6월 12일)
기사 전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6122105005&code=2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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