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수] 멈춤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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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6-02 16:36 조회29,47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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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딱딱 인과의 사슬로만 굴러가는 것은 아닌 듯하다. 전보다는 더 틈과 우연, 공백이 눈에 보인다.
‘등불 밝힌 더블린 세탁소’는 윤락 여성의 보호를 위해 개신교단에서 운영하는 기관이다. 마리아라는 40대 여성은 그곳 주방에서 일하며 혼자 살고 있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더블린 사람들’(진선주 옮김, 문학동네)에 나오는 ‘진흙’이라는 작품 이야기다. 가난과 무기력이 지배하던 20세기 초 아일랜드 더블린이 배경이다. 만성절 전야(켈트력으로는 섣달 그믐날)의 만찬에 초대받은 마리아는 지금 한껏 들떠 있다. 자신이 유모처럼 키운 조의 집에 가서 송년 모임을 가질 생각에 ‘세탁소’의 저녁 준비를 하면서도 마음은 바쁘기만 하다. 소설에 묘사된 그녀의 용모는 볼품없다. 착하고 수줍기만 한 그녀가 결혼 이야기처럼 당황스러운 화제가 나올 때 보이는 반응은 “코끝이 거의 턱 끝에 닿도록” 웃는 것인데, 사람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정형화되었을 그 마녀의 이미지는 그녀의 심성과도, 그녀의 성스러운 이름과도 너무 대조적이다. 그러나 작업복을 벗고 준비해둔 블라우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서자 스스로가 보기에 “아직도 멋지고 깔끔하고 아담한 몸매”이다. 아껴둔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조네 아이들에게 줄 과자를 한 봉지 산 뒤 제과점을 나섰지만, 그녀는 근사한 무언가를 더 사고 싶어 한참을 궁리한다. 다시 제과점에 들어가 건포도 케이크를 한 덩어리 산다. 케이크는 깜짝 선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조의 집에 도착하고 보니 케이크가 없다. 전철에서 자리를 비켜준 뒤 이야기를 걸어오던 술 취한 신사가 생각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조금씩 안 좋은 일들이 만성절 전야의 시간 안으로 끼어든다. 조는 호두까기가 안 보이자 버럭 화를 낸다. 사이가 안 좋은 동생 이야기가 나오자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만성절 전야 놀이에서 이웃집 소녀가 접시 하나에 진흙을 놓아두고(진흙을 집으면 곧 죽게 된다는 속설이 있단다) 마리아가 그걸 집는 바람에 작은 소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조의 부탁으로 마리아는 아일랜드의 유명한 오페라 아리아 ‘내 살고 싶은 곳 꿈꾸었네’를 부르는데 2절을 불러야 할 때 다시 1절을 되풀이 부른다. 가사의 마지막은 이렇다. “그보다 날 더 기쁘게 하는 꿈이 있었으니/그것은 그대의 늘 변함없는 사랑이어라.” 아무도 그녀의 실수를 지적하지 않는다. 사실, 이것이 실수인지도 알 수 없다. 노래를 듣다 자기감정에 겨워진 조의 두 눈에는 눈물이 한가득 차오르고, 흐려진 눈 탓에 이번에는 병따개를 찾을 수가 없다. 소설은 여기에서 끝난다. (후략)
정홍수 문학평론가
(한국일보, 2016년 5월 26일)
기사 전문 http://www.hankookilbo.com/v/f93271ec208e448cad65224f9f2a6d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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