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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갑우] 미국·쿠바의 ‘함께 걷기’ 여전히 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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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5-11-03 20:27 조회32,4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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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1월1일 쿠바혁명 이후 미국은 쿠바와 단교했다(1961년 1월의 사건으로, 약 1개월 후 쿠바혁명의 주역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혁명의 사회주의 성격을 언급했다). 1960년대에 경제전쟁과 무력충돌을 거친 쿠바·미국 관계에서 전환점이 마련된 해가 1977년이다. 그해 미국과 쿠바는 각각의 수도에 대사관 이전 단계인 ‘이익대표부’를 설치하는 데 합의했다(2014년 현재 스위스 대사관 산하에 있던 미국의 이익대표부에는 외교관 51명, 현지 쿠바인 300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 대규모의 탈쿠바 행렬과 미국 대통령 카터의 재선 실패로, 미국과 쿠바의 관계정상화는 이루어지지 못했다(1994년 한반도 위기 시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던 것처럼, 2002년과 2011년 카터는 쿠바를 방문해 두 국가의 관계를 중재하려 했다).

쿠바·미국 관계 전환의 역설적 계기는 1994년 여름 소련의 붕괴 이후 쿠바를 강타한 경제위기로 쿠바를 떠나려는 인민들의 또 한 번의 엑소더스였다. 카스트로의 대응은, “갈 테면 가라”였다. 카리브해에 보트와 뗏목을 이용해 탈출하려는 쿠바인들이 점증하자, 미국은 쿠바와 협력하고자 했다. 합법적 이민을 허용하는 것은 물론, 안보 및 군사 협력에도 합의했다(비슷한 시기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과 제네바합의에 도달한 바 있다). 1995년 3월 쿠바는 1967년에 합의한 ‘중남미 핵무기 금지조약’에 미국의 쿠바에 대한 ‘적대시 정책’이 지속되고 있음을 부기하며 서명했고, 2000년엔 러시아의 지원으로 핵발전소를 건설하는 계획을 포기했으며, 2002년 10월 그 조약의 비준과 더불어 ‘핵무기 확산 방지조약’에 가입했다(북한의 논리와 비슷하지만, 이 시기 쿠바는 핵우산 또는 핵개발의 길이 아니라 국제 제도를 활용하는 선택을 했다).

2009년 4월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쿠바 여행과 송금을 허용하면서 전임 부시 행정부와 차별화된 대쿠바 정책을 시작했다. 2009년 12월 쿠바 내 인터넷 접근을 높이려 했던 미국 시민이 간첩행위로 체포되면서 암초가 발생했지만, 이 사건은 다시금 협상과 협력을 위한 계기가 되었다. 2011년에는 2006년부터 피델 카스트로의 권력을 계승한 동생 라울 카스트로가 배급제 축소와 자영업 확대와 같은 부분적으로는 시장경제로의 이행으로 해석될 수 있는 개혁조치를 취했다. (후략)


구갑우 북한대학원대 교수, 정치학

(경향신문, 2015년 11월 1일)


기사 전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1012105585&code=99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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