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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엽] 총선 캠페인 하나를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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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3-29 16:20 조회30,4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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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총선이 20일쯤 남았다. 이번 총선은 관찰자로서는 관심 가는 몇몇 지역구가 있긴 하지만, 참여자로서는 전혀 열정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소감이다. 정치란 동기보다 결과를 지향하는 행위이고 정서의 표출보다 계산을 앞세워야 하는 영역이긴 하다. 그러니 내가 가진 표의 효과를 극대화할 합리적인 투표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총선을 생각하면 그런 방안을 찾는 일을 제치고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지난 19대 총선 날이었다. 아침나절 투표를 마치고 마루에 앉아 티브이로 투표 중계를 보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나서 문을 여니 택배기사였다. 그가 건네준 물건은 이틀 전 온라인서점에서 주문한 책이었다. 잔뜩 짐을 든 택배기사에게 “이렇게 배달 물건이 많으면 투표하러 가기도 쉽지 않겠네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투표할 짬이 나나요”라고 퉁명스럽게 말하곤 엘리베이터 안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우리 사회에서 어렵게 사는 많은 이들이 투표하러 갈 시간조차 없이 쫓기며 살고 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선거일에 내 물건을 배달하느라 투표할 짬을 못 낸 택배기사와 마주치고 보니 몹시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온라인서점에서 책을 주문했기 때문에 그에게 일감이 생긴 것이긴 하다. 하지만 거대 온라인서점, 배송업체, 택배기사로 이어지는 갑을연쇄의 끝에 있는 택배기사는 참정권을 위협받을 정도로 박한 배송비와 신속 배송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이들이 택배기사에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총선 날에도 백화점과 대형마트는 문을 연다. 거기서 일하는 이들 또한 참정권을 위협받을 것이다. 자영업자라면 선거 공휴일에도 일하는 것이 자기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그도 일정 수입 확보를 위해 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역시 참정권은 제약되고 있는 것이며, 그가 고용한 몇 명의 점원이나 알바노동자의 시민권 또한 제약되는 셈이다.


여기에 어떤 악순환이 작동하는지 알긴 어렵지 않다. 일하는 가난한 이들은 투표하기 어렵고 그래서 그들을 대의할 정치인들이 의회에 진출하기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다음 선거에서도 이들은 투표 기회를 제약하는 가난과 노동 부담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문제는 이런 악순환이 집단적인 노력 없이는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이다. 어떤 개인은 총선 일주일 전부터 온라인서점에 책을 주문하지 않을 수 있고, 그렇게 해서 죄의식을 덜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선택은 일정 규모가 되지 않는 한 아무런 효력이 없다. 투표일에 택배기사가 쉬는 것이 더 효율적인 수준까지 주문이 줄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캠페인과 동원이 필요하다. 그래서 제안하고 싶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4, 5일 전부터는 알라딘이든 예스24든 책 주문을 미루고, 쿠팡이든 티켓몬스터든, 지마켓이든 인터파크든, 혹은 티브이 홈쇼핑이든 물건 주문을 총선 뒤로 미루는 것이다. 그리고 대형마트나 백화점에도 가지 않겠다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로 알리고 친구들의 동참을 요청하는 것이다.(후략)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한겨레, 2016년 3월 23일)


기사 전문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3648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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