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염무웅의 해방 70년, 문단과 문학 시대정신의 그림자](3) 남한 주류문단의 형성 - 김광섭·김동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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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3-29 16:31 조회29,89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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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김광섭·김동리, 우파 문학의 득세…‘다른 문학’이 닫혔다
민족문학의 건설이란 구호 아래 해방기 문단을 장악했던 조선문학가동맹은 그러나 채 2년도 지나기 전에 수명이 다한다. 좌익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강화되고 이승만의 보수적 정치노선이 승리했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적 배경에서 박종화·이헌구·김광섭 등이 이끌던 ‘전조선문필가협회’와 김동리·서정주·조연현 등이 주도한 ‘조선청년문학가협회’는 ‘한국문학가협회’(문협)로 통합됨으로써 마침내 문단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세 차례의 큰 행사를 치르게 된다.
첫 번째는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12월27~28일 이틀간 서울시공관에서 열린 ‘전국 문화인 총궐기대회’로, 박종화 사회로 진행된 첫날 대회에는 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해 국회의장, 국무총리, 문교장관 등 내빈이 다수 참석해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문화인들의 모임에 이처럼 최고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것은 역사상 전무후무할 것이다. 말하자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문화적으로 축하하는 행사였다.
두 번째는 1949년 12월3~4일 ‘한국문화연구소’라는 낯선 단체 명의로 개최된 종합예술제였다. 이 대회는 겉으로는 예술제였지만 실제로는 소위 좌경문인들의 전향이 공개적으로 강요되는 자리였다. 정지용·김기림·정인택 등이 그 자리에 왔다. 물론 그들이 조선문학가동맹에 이름을 올린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사상적으로 좌익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으며 체질적으로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 고고한 예술가들을 관제행사에 끌고 나와 억지춘향 노릇을 시킨 것은 그들 개인에게뿐 아니라 한국문학 자체에도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마지막으로 1949년 12월17일 오후 문총회관에서 열린 문협 결성식이다. 이날 개회사에서 문협 준비위원장 박종화는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한다. “일제시대엔 그렇지 않았던 문학인들이 8·15 이후 길에서 만나도 외면하고 지낸 것은 우리의 슬픈 현실이었다. 그것은 한갓 과도기적 현상으로, 이제 다시 굳게 손을 잡고 좋은 문학을 발전시키자.” 이것은 다름 아닌 우파 문학의 승리 선언이었다. 어떻든 문단질서가 이렇게 귀결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필자가 보기에 김광섭과 김동리다. 물론 오늘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런 활동을 통해 성취한 문학 자체의 품질이다.
■민족문학에 대한 논설 발표한 김광섭
김광섭은 젊은 시절부터 언제나 자신을 민족주의자로 자각하고 있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많은 문인들이 친일로 기울던 1940년대에 그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3년 7개월이나 감옥살이를 한 것은 의외로 주목받지 않고 있는 사실이다. 당시를 회고한 글 ‘사상범’(월간 ‘다리’, 1972)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다. “민족은 근원이다. 그러므로 그 민족에 속한다는 가장 단순한 생각 하나만으로도 민족의식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해방을 계기로 김광섭의 민족주의는 갑자기 전투적 행동주의로 변모한다. 평생의 동지 이헌구와 더불어 문인단체의 조직을 주도했을뿐더러 1946년 6월 창간된 엄항섭 사장의 ‘민주일보’에 각각 편집국장과 사회부장으로 참여했고 이듬해 봄에는 윤보선 사장의 ‘민중일보’ 부사장과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정부 수립 후에는 공직을 맡기도 했다. 김광섭 발행인 밑에서 편집장으로 일했던 시인 김시철은 ‘자유문학’ 창간 무렵의 김광섭을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김광섭 시인은 당시 많은 요직을 갖고 있었다. 정부 수립 후 초대 대통령 공보비서를 역임한 후, 당시 자유당 서울시당 위원장, 경희대 교수, 문총 대표최고위원에 문협 위원장, 그리고 세계일보사 사장직도 겸임하고 있었다.” 이는 그가 이승만 정권에 얼마나 깊숙이 밀착되어 있었던가를 말해주는 하나의 증언이다.
그러나 그가 권력 자체를 탐했거나 문학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공직에 있는 동안에도 꾸준히 이른바 애국시를 썼고 민족문학에 관한 논설들을 발표했다. 어떤 점에서 그의 활발한 사회활동은 민족주의적 신념의 현실적 관철을 위한 것일 수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그의 문필활동과 오히려 상호보완적이었다. 그런데 그는 앞서 말한 ‘전국 문화인 총궐기대회’ 끝머리에 공직자의 자격으로 연설을 한다. 그러고 나서 며칠 뒤에는 ‘1949년 1월1일’이라는 날짜가 명기된 ‘새나라!’라는 시를 발표하는데, 강연의 내용이 짐작되는 작품이다. 뒷부분을 인용한다.
“괴뢰에 아첨하는 자/ 중간에서 헤매는 자/ 침묵으로 말살하려는 자/ 졸렬한 도피자/ 그대들은/ 어디로 갈 터이냐/ 오라/ 민족의 노래를 부르라/ 감격과 경이와 정열로/ 대한민국을 세우라” 이는 단순히 대한민국에 대한 찬가가 아니다. 중간파의 존재 가능성을 부인하고 나아가 정치로부터의 은둔과 사회적 침묵에 대해서조차 공격을 퍼붓는다면 그것은 자유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자이자 문학주의자, 김동리
김동리와 김광섭은 좌파와의 싸움에서는 동지관계였지만 문학적으로나 인간적으로는 아주 다른 존재였다. 김동리도 큰형 김범부(金凡父)의 영향으로 강한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자이고 문학주의자였다. 이념투쟁에 앞장섰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표는 정치참여가 아니라 그 나름의 ‘순수문학’ 옹호였다. 젊은 시절 신문사 문화부장으로 근무하고 1980년대에 국정자문위원으로 이름을 올린 것이 외도라면 외도이고, 그 밖에는 오직 문학 관련 단체의 직책만 맡고 문학을 가르치는 대학에서만 일했다. 이 집념과 열정이 그로 하여금 1950년대부터 30년 동안 대한민국 문단의 실질적 지도자로 군림하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순수’라는 낱말을 비평의 개념으로 처음 사용한 사람은 소설가 유진오였다. 그는 1939년 ‘순수에의 지향’이란 에세이에서 “도대체 문학정신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문학정신이란 본질적으로 인간성 옹호의 정신은 아니었던가”라고 전제하고 나서 당시의 신인작가들을 향해 비판적 소감을 피력했다. 이에 대해 김동리는 즉각 격렬하고 예리한 반격에 나섰다. 주목되는 것은 논쟁의 과정에서 ‘순수’ ‘문학정신’ ‘인간성 옹호’ 등 유진오가 꺼내든 주요 개념을 거꾸로 김동리가 상대방 공격에 사용했고 이후에도 계속 자신의 이론적 무기로 장악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김동리가 선배작가의 개념을 차용하는 데만 그친 것은 아니다. 그는 유진오에게 “30대 작가들의 인간성 옹호의 정신은 얼마만한 문학적 표현을 가진 것이며 또 지금 가지고 있는가”라고 물음으로써 쟁점을 문학에 있어서의 핵심적 지점으로 옮겨놓았다. 그런 점에서 그가 참된 문학을 ‘심각한 인간고(人間苦)의 표명’으로 본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개성과 생명의 구경(究竟)의 심연”이라는 특유의 형이상학에 입각하여 인간고를 해석할 뿐, 자기와 다른 입장에서 시대현실의 문제를 고민하는 작가들의 노력을 “어떤 우상적 이념의 지배나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소산”이라고만 매도하는 것은 김동리 나름의 또 하나의 이념적 편향이 아닌지 의심할 만하다. 평론집 <문학과 인간>(1948)은 김동리의 이런 날카로운 비평적 문제의식과 논리적 허점을 아울러 보여주는 한 시대의 문학적 초상이다.
김동리는 이념투쟁에 몰두하는 동안에도 소설 창작에 소홀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문학의 자율성’을 극력 주장하면서도 그것이 사회현실에 대한 다방면적 관심과 배치되지 않음을 작품을 통해 입증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과가 한결같은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혈거부족>(1947)이나 <귀환장정>(1951) 같은 단편은 리얼리즘의 성취라고 할 만한 수작인 반면 장편 <해방>(1949)은 노골적인 사회비판의 의도로 인해 도리어 균형을 잃은 실패작이다.(후략)
염무웅 |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경향신문, 2016년 3월 21일)
기사 전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3212210225&code=2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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