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제] 유토피아의 중간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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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2-05 16:07 조회32,52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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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의 ‘해외원조’ 정책은 21세기에 전 지구적 차원의 집단적 이성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영감을 준다. 환경이나 발전은 3세대 인권에 속하지 않는가. 지난 500년간 긴장 관계를 유지해온 유토피아 사상과 인권이 21세기 들어 화해의 전기를 마련한 것 같다.
서양 고전 목록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나온 지 꼭 500년이 되었다. 최근 여러 매체에서 <유토피아>를 언급하기 시작했고 올 한해 세계 각지에서 학술대회와 포럼이 열릴 예정이다. 책 제목인 고유명사 ‘유토피아’는 이상향을 가리키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이참에 인권과 유토피아 간의 관계를 짚어보면 좋을 것 같다. 중요한 주제인데 의외로 연구가 드물다. 우선 <유토피아>에 나오는 인권 현실을 정리해 보자. 모어가 묘사한 이 신기한 나라는 오늘날 인권 기준으로 평가하더라도 괜찮아 보이는 구석이 적지 않다.
유토피아에 사는 사람들은 완전고용 상태에서 하루 6시간만 일하면 된다. 그러고도 물자가 남아돈다. 학자에겐 일반노동이 면제되지만 연구노동에 전념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사람들 사이에 출생 신분이나 가문에 따른 차별적 지위 관념이 거의 없다. 헬조선에서 흙수저를 한탄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솔깃하지 않을 수 없는 땅이다. 모든 이에게 고른 수준의 의식주가 보장되고 평등한 무상의료가 제공된다. 한마디로 생계에 대한 근심걱정을 잊고 살 수 있는 나라다. 어린이들의 양육과 보육까지 사회가 책임져주니 대한민국보다 선진적인 누리과정을 가졌다. 노인을 공경하는 풍토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깍듯한 것도 이곳의 특징이다. 종교의 자유, 선교의 자유 등 수준 높은 관용의 신앙관이 통용된다. 사람들은 합리적이어서 일종의 자연법적 사고가 사회 전체의 통념처럼 되어 있다. 이웃나라와 달리 동물을 잡아 제사에 바치지 않으니 동물 복지도 실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모어로 모든 분야의 학문 활동이 가능하니 이 또한 여러모로 부러운 지적·문화적 환경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토록 풍족하고 여유 있어 보이는 사회의 이면에는 인권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아니 인권과 정반대되는 현실이 병존하고 있어 긍정적인 관찰자를 당황하게 만든다. 사람들 사이의 상하관계가 확실하고 권위주의적 사회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다. 아내는 남편에게, 아이는 부모에게, 연소자는 연장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심지어 아내는 남편에게 매달 자기 죄를 고백하게 되어 있다. 거주와 이동의 자유도 엄격히 제한된다. 허가증 없이 여행하다 적발되면 중벌을 받는다. 사유재산은 일절 허용되지 않으며 모든 물품과 주택을 공유한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선술집도 없고,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숨을 곳도 없으며, 남녀 간에 밀회할 장소는 더더욱 없다.
성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결벽증적인 규율을 강요한다. 혼전 섹스를 하다 적발되면 평생 독신의 처벌을 받는다. 간통하다 잡히면 패가망신을 각오해야 하고, 두 번째 걸리면 바로 사형이다! 노예제가 있는 것도 유토피아의 치명적인 반인권 현실이다. 전쟁포로와 국내 범죄자는 노예나 백정이 되어 인간 이하의 지위로 강등된다. 노예들이 봉기를 일으키면 무조건 사형에 처한다. 만일 외국에 농사짓지 않고 내버려둔 유휴지가 있으면 전쟁을 선포해서 그 땅을 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전형적인 제국주의의 침략 논리다. 사법체계가 극히 미약하며 범죄 형량이 정해져 있지 않다. 법률가도 따로 없다. 한마디로, 법적 주장을 할 수 있는 권리의 체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이 두 현실은 우리에게 골치 아픈 해석의 문제를 제기한다. 앞에서 봤던 목가적이고 유족한 삶과, 뒤에서 본 억압적인 통제가 어떻게 같은 사회 내에 공존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유토피아>를 필두로 일련의 유토피아 사상들이 출현했던 시대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중세 봉건시대는 한마디로 총체적인 신분사회였다. 종교, 정치, 경제, 문화, 법, 가문 등이 큰 덩어리처럼 얽힌 상태에서 피라미드식 서열구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전근대 체제를 허물기 위해 두 가지 조류가 발생했다. 하나는 자연권 사상에 근거하여 개인의 이성과 자율성을 강조하는 흐름이었다. 모든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독자적인 소우주를 이루고, 이 개인들은 어떤 이유로도 침해받지 않는 주관적 기본권을 가진 실체로 인정되었다. 이런 개인들은 각자 자기 삶의 자율성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서로 합의하에 국가공동체를 구성하게 된다. 즉, 개인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다. 이것이 근대적 계약론의 핵심이다.
근대적 계약론에서 개인은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 격상된다. 국가와 정치의 목적 달성도 일단 개인 권리가 존중되는 바탕 위에서만 논할 수 있다. 여기서 모든 개인은 서로 평등한 상태에서 자기만의 고유한 이성적 판단을 한다. 그러므로 정치에서 고정되고 선험적인 정답을 가정할 수 없다. 그 누구도 사회의 선익에 대해 최종적 해답을 주장할 수 없다. 따라서 다양한 이성적 판단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잠정적 진리를 찾아갈 수밖에 없다. 미리 정해진 답이 없는 상태에서 경쟁하게 되면 누가 더 나은 논증과 더 나은 설득을 제시하느냐 하는 것만이 궁극적인 판단기준이 된다. 이것이 인권에 기반을 둔 주권재민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이다. 이에 따르다 보면 결과적으로 유토피아 사회와 비슷한 정책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미리 설계되어 있는 청사진으로서의 유토피아를 상정하진 않는다. 그렇게 접근하면 선후가 뒤바뀐 것이다.(후략)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16년 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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