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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수] 일상을 견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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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3-09 14:53 조회31,7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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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의 단편 ‘벌레 이야기’에서 아이를 납치해 살해한 끔찍한 가해자가 이미 신으로부터 용서를 얻은 평온한 얼굴로 피해자 어머니를 대하는 대목은 지금 돌이켜도 섬뜩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소설에서 펼쳐진 기막힌 상황이 더 전율스럽고 견딜 수 없게 느껴진 것은, 작품이 발표된 1985년 당시 한국의 정치 현실이 이 소설의 숨은 맥락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때는 전두환의 집권기였다. ‘땡전뉴스’의 시절이기도 했지만, 권력을 장악한 학살 주역들의 얼굴 어디에서도 죄의식과 가책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너무도 당당했고, 오히려 피해자들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숨겨야만 살아갈 수 있는 시절이었다. 도대체 그들은 언제 누구로부터 용서를 얻었던 것일까. 아니, 용서를 구하기라도 했을까. 사법적 단죄는 1996년에야 뒤늦게 이루어졌지만, 학살 주역들의 입에서 진실된 참회의 말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나는 접한 적이 없다. 어쩌면 그들에게 사람살이의 도리는 다른 차원의 세상과 언어를 구성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얼굴을 들고 나와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게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 정말 수상하다.


그렇긴 해도 세상이 조금씩이라도 나아져온 것은 사실이다. 퇴행의 조짐이 있고 더 악화된 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좀더 강하게 주장할 필요도 있다. 192시간여 진행된 필리버스터가 국민들에게 작지 않은 감동을 주었다면, 거기 이만큼의 민주주의에 도달하기까지 여러 사람들이 함께 흘린 피와 눈물의 벅찬 확인과 교감의 순간이 있었기 때문일 테다. 그리고 그 과정의 힘겨운 진퇴가 실은 거창한 대의명분이나 정의의 이름만으로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새삼 느꼈기 때문일 거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긴 토론의 시간에서 의원들은 결국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토해낼 수밖에 없었고, 국회의원이든 누구든 민주주의가 결국 사람살이의 문제라는 공명을 낮지만 깊이 불러내지 않았나 싶다. (후략)


정홍수 문학평론가

(한국일보, 2016년 3월 3일)


기사 전문 http://www.hankookilbo.com/v/2d87bb3f7ecd4e99924331e373d2dd5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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