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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 압도적인 절망과 한줌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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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3-09 15:00 조회31,8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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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미 의원이 국회 연설을 하면서 “청년 아르바이트생, 유성·쌍용차 노동자들, 고공농성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린 것은 적어도 한국 정치에서는 낯선 사례에 속한다. 그것은 정치적이라기보다 문학적인 상상력의 발동에 가깝다. 아니, 정치와 문학이 함께 뿌리내리고 있는 공동의 생활적·정서적 기반에 관계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내가 은수미 의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누구나 그에 관해 알 만한 것들뿐이었다. 일면식도 없음은 물론이고 ‘사노맹’ 사건으로 오랜 감옥살이를 했다는 것, 노동 문제에 상당한 전문가라는 것 정도의 단편적 지식도 풍문을 통해 간간이 얻어들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국회에서 한밤중인 2시30분부터 그날 낮 12시48분까지 10시간18분 동안 테러방지법 반대토론을 행한 것에 은수미답다고 탄복했던 것을 보면 내가 그에게 은연중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며칠 뒤 그와의 인터뷰 기사(<경향신문> 2016년 2월27일치)를 읽으니 그에 대해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들은 실상 껍데기에 지나지 않음이 드러났다.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내가 했던 것 같다. …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들과 함께하고 싶어한다는 신호를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사실 국민들은 함께하고 싶다는 구조신호를 계속 보냈다. 세월호도, 메르스도 너무 참담했으니까.” 또 그는 이렇게도 말한다. “사람들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만난 청년 아르바이트생, 유성·쌍용차 노동자들, 고공농성하는 사람들, 로또방에서 로또 긁고 있는 일용직 아저씨들, 횡단보도에서 손녀 학원 가는 뒷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며 ‘현실이 이렇습니다’ 하던 어떤 할머니….”

의정 단상에 올라서도 몸으로 이런 걸 느낄 수 있고 이 느낌을 정치적 언어로 옮겨서 발언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진정 국민의 대변자다, 이건 옳은 말이지만 옳은 만큼 뻔한 소리이기도 하다. 물론 이 뻔한 상식이 우리나라 정치에서 일상적으로 통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터뷰에서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은수미가 추구하는 ‘정치적 올바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게 했던 감수성의 구조였다. 국회 연설을 하면서 “청년 아르바이트생, 유성·쌍용차 노동자들, 고공농성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은 적어도 한국 정치에서는 낯선 사례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치적이라기보다 문학적인 상상력의 발동에 가깝다. 아니, 정치와 문학이 함께 뿌리내리고 있는 공동의 생활적·정서적 기반에 관계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사실은, 그 인터뷰가 특별한 울림을 주었던 것은 최근 내가 읽고 있는 시와 소설들이 은수미가 떠올렸던 바로 그 사람들의 현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출간된 지 한두 달밖에 안 된 따끈따끈한 책들인데, 이인휘 소설집 <폐허를 보다>, 송경동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그리고 김사과 산문집 <0 이하의 날들>이 그것들이다.

돌이켜보면 1920년대 이후 우리나라 근대문학의 역사에서 넓은 의미의 민중문학은 언제나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일제강점기나 6·25전쟁 직후의 가난했던 시절까지 돌아갈 필요도 없이 1970년대에는 신경림의 <농무>, 김지하의 <오적>, 황석영의 <객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 민중문학의 걸작들이 다수 발표되어 공론장을 장악했고 1980년대에는 알다시피 노동운동의 폭발적인 발전 및 노동문학의 급진적인 개화가 일어났음을 상기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런데 오늘 문제는 1990년대 이후, 특히 외환위기 이후 이 나라 현실이 내부적으로 심대한 변화를 겪어왔다는 것이고 그 변화가 정치에도 문학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지배체제로서의 신자유주의의 도래라고 하겠는데, 지식세계의 담론으로서는 식상할 만큼 낡았으되 피부에 닿는 압박의 강도로서는 날로 절박함이 더해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소설가 이인휘는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기 이전의 노동운동의 기억을 통해 오늘을 바라본다. 이번 소설집의 표제작 ‘폐허를 보다’에서 중심적 사건은 1998년 울산 자동차공장 파업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파업의 실패다. 노조 지도부의 배신으로 인한 실패로서, 그 때문에 많은 노동자들이 회사에서 쫓겨나 생업을 잃었고 투사들 몇은 후유증으로 죽었다. 작품은 지금 어느 식품회사 핫도그공장에서 일하는 죽은 노동자 아내의 시점으로 당시의 투쟁 과정을 회상한 것인데, 당연히 그들에게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소설집 <폐허를 보다>에서 내가 감동한 작품은 ‘시인, 강이산’이다. 소설은 화자가 1985년 신흥정밀이라는 회사에 위장취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거기서 그는 강이산과 박영진이라는 또래 친구들을 만나 의기투합, 운동의 조직을 시도한다. 전태일의 정신을 따르던 박영진은 이듬해 3월 전태일이 그랬듯이 “근로기준법 준수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분신자살하고, 강이산은 방황을 거듭한다. 실존인물 박영진의 에피소드가 강렬하긴 하지만, 작품의 주인공은 박영근 시인을 모델로 한 강이산이다. 그는 노동자에서 시인으로, 그리고 노동 현실을 고발하는 전투적 시인에서 개인적 상처와 고뇌의 근원을 응시하는 내성적 시인으로 변모해가다가 결국 자살에 가까운 죽음에 이른다. 폐부를 찌르는 아픔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은 어쩔 수 없이 주변부로 밀려나는 것이다.(후략)


염무웅 문학평론가
(한겨레, 2016년 3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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