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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인권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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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5-09 16:06 조회30,0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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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을 비롯한 현대인권의 설계자들은 깊은 차원에서 인권을 달성할 수 있는 거시적 근본조건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냉전과 지정학적 경쟁, 인권의 정치도구화 때문에 거의 완전히 잊혀졌다. 인권유린의 근본원인까지 파헤쳐 해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졌다.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내 개인권리만 찾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보는 것이다. 반대로, 사회를 바꾸려는 거대한 행진 앞에서 개개인의 사소한 권리는 뒤로 좀 밀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숲만 볼 줄 알지 나무의 문제를 못 본 것이다.


작년 이맘때 파키스탄의 카라치에 있는 ‘2층’이라는 카페에서 공개토론 모임이 열렸다. 사회적 기업으로 운영되던 ‘2층’은 문화공연 공간이자 시민운동의 보금자리 같은 곳이었다. 그날 모인 참석자들은 파키스탄의 분리주의 세력과 보안군이 충돌하고 있는 발로치스탄주에서 일어나는 주민 실종 사태에 관한 증언을 듣고 인권 보호 방안을 논의했다. 밤 9시쯤 행사가 끝난 후 카페 운영자 사빈 마흐무드는 자기 차를 몰고 귀갓길에 올랐다. 출발한 지 몇 분이 채 안 되어 교차로에서 신호대기 중이던 사빈은 오토바이를 탄 괴한이 쏜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절명했다. 마흔살의 열정적인 여성 인권운동가가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것이다.


멀티미디어 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빈은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는 나라에서 ‘2층’ 카페를 통해 젊은이들에게 오아시스의 장을 마련해 주었다. 카페 운영만이 아니라 인권 캠페인과 사회운동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온라인에서 자유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힘썼던 사람이었다. 사빈의 죽음은 오늘날 이슬람권의 인권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용의자를 잡고 보니 명문대를 나온 젊은 이슬람주의자였다. 그는 사빈이 밸런타인데이를 공공연하게 축하하고, 테러를 지지하는 이슬람 성직자를 규탄하는 집회에 참석하는 등 이슬람 정신에 어긋나는 짓을 저질러 범행을 결심했다고 진술했다. 파키스탄 사회가 이슬람 원리로 똘똘 뭉쳐야 하는데 감히 개방성과 다원주의를 설파한 게 괘씸해서 죽였다고 당당히 고백했다고 한다. 배후가 누구인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카라치는 파키스탄에서 가장 큰 도시인데 매년 수백건의 표적암살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정치적 반대자가 아니라 인권운동가에 대해서까지 극단적인 인권침해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충격적이다. 하지만 해결 방법을 생각해보면 간단치가 않다. 진상을 규명하고 배후를 파헤치고 범인을 처벌하고 유가족에게 배·보상을 하고 유사범죄가 재발하지 않도록 제도적 조처를 취할 수 있으면 아마 최선의 해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의 통상적 해법도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런 해법에는 결정적 한계가 있다. 사건의 근본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빠져 있다. 카라치 지역 정당들의 혈투, 그 배후에 깔린 토지와 권력 쟁탈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에서 벌어지는 분권화를 둘러싼 갈등 등이 원인으로 제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만으로 사빈의 암살 원인을 다 알 순 없다. 더 깊은 차원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 파키스탄을 비롯해 이슬람권에서 커지고 있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21세기의 세속주의, 정교분리 원칙과 충돌하는 경계면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닐까.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슬람 근본주의를 오늘날 이렇게까지 키운 것은 중동의 지정학적 요인과 서구의 지배전략에도 책임의 일단이 있지 않을까.


사빈의 암살을 암살자의 범행으로만 본다면 직접적 가해 위주의 인과관계로 사건을 파악하는 것이고, 근본원인까지 감안한다면 설명 위주의 인과관계로 사건을 파악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절대다수의 인권침해는 전자에 의해서만 설명된다. 그 어떤 인권유린 사건도 근본 원인까지 속속들이 파헤쳐 끝장을 보는 식으로 해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바로 이런 것이 ‘인권의 잃어버린 고리’이다.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는 물리적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치를 떨지만, 그런 침해를 일으키는 구조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기도 어렵고, 알고 싶지도 않고, 안다고 해도 뾰족한 해결책이 없어 보인다. 이 문제는 인권 연구에서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왜 미시적이고 가시적인 인권침해에만 집중하고,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인권침해엔 무심한가.


인권에 접근하는 가장 흔한 방법이 바로 눈에 보이는 폭력과 차별과 불의에 맞서는 것이다. 이것을 ‘인권문제 해결 패러다임’으로 부를 수 있다. 주로 법과 제도를 통해 인권침해를 시정하는 방식이다. 오늘날 인권 담론의 9할 이상이 인권문제 해결 패러다임에 속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원래 이렇지는 않았다. 현대 인권 담론이 만들어진 1945년부터 약 20년간의 문제의식은 오늘날과 많이 달랐다. 유엔을 비롯한 현대 인권의 설계자들은 깊은 차원에서 인권을 달성할 수 있는 거시적 근본조건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후략)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16년 5월 3일)


기사 전문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4234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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