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염무웅의 해방 70년, 문단과 문학 시대정신의 그림자](8) 4·19, 다양성 억압한 전후 ‘순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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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8-16 13:53 조회32,87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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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과 신동엽은 한창 젊은 나이에 6·25를 겪었음에도 동년배 선우휘·오상원·서기원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전후문학’에는 속한다고 보기 어렵다. 같은 세대의 이범선·김광식·정한숙·김춘수·박용래·천상병 등도 각자 나름의 뜻에서 ‘전후문학’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들 세대 경험의 핵심일뿐더러 한국 현대사의 고난의 결정체라 할 6·25전쟁을 상기하지 않고서 그들의 문학을 설명할 수는 없다. 김수영과 신동엽이 자기들 문학에서 하려고 했던 것도 따지고 들면 동족상잔의 뿌리에 있는 비극의 근원을 탐색하고 삶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었다. 그런 작업을 통해 그들은 자기 세대를 넘어 1960년대 이후를 향한 문을 열었던 것이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4·19를 전후한 시대의 문단 풍경을 살펴보려고 한다.
■문단 지형을 바꿔놓은 4·19와 5·16
김동리·서정주·조연현 등이 각자의 분야에서 이룩한 문학적 업적은 당연히 존중되어야 하겠지만, 해방시기 이후 이들 그룹이 주도한 ‘순수문학’ 이념은 이승만 반공체제의 손발이 되어 문학의 다양성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했다. 1949년 12월 결성된 ‘한국문학가협회’도 문인들의 독립적 활동을 수호하기보다 정권의 문화적 선전기구 노릇에 그쳤다고 할 수 있다. 문단 상층부의 이 예속적 획일성에 얼마간 균열이 생기는 건 대략 1955년 무렵이었다. 예술원법이 제정되고 예술원이 출범하면서 조연현·김동리 등이 문단의 실권을 행사함에 따라 여기서 소외된 문인들이 김광섭·이헌구·모윤숙 등을 중심으로 1955년 4월 ‘한국자유문학자협회’를 따로 조직했던 것이다. 문단이 크게 양분된 셈이었는데, 명분 없는 이권다툼에 실망한 시인들은 1957년 2월 ‘한국시인협회’라는 딴살림을 차리기도 했다.
4·19혁명과 5·16쿠데타라는 정치적 격동은 문단 지형에 적잖은 변화를 가져왔다. 무엇보다 4·19는 문단 지도부의 어용적 행태에 타격을 가했다. 소설가 오상원은 ‘만송족은 숙청돼야 한다. -문단에 보내는 공개장’(동아일보 1960년 5월8일)에서 부정선거 운동에 협력했던 문단 상층부를 신랄하게 공격했고, 시인 조향은 ‘나는 고발한다’(동아일보 1960년 5월10일)에서 ‘민주반역도당’ ‘민주주의의 역적’ 같은 과격한 언사를 써가며 더욱 격렬하게 성토했다. 조지훈·박두진·박남수 등 한국시인협회 시인들의 현실비판적 발언이 나온 것도 이런 문맥 속에서였다.
더 중요한 사실은 젊은 문인들이 일종의 반란을 시도한 것이다. 이 연재의 제5회에서 언급한 ‘전후문학인협회’(전후문협) 결성이 그것인데, 당시 신문(경향신문 1960년 5월25일)에 의하면 문인 16명이 발기인이 되어 5월28일 창립총회를 열었다. 서기원·오상원·이호철·최상규·송병수·김동립·최인훈 등 소설가, 신동문·구자운·박성룡·성찬경·박희진·고은·민재식 등 시인, 홍사중·이어령·유종호 등 평론가들이 창립회원이었다. 주목받는 신진작가들이 망라되다시피 했다는 점에서 전후문협은 한국문학사의 연대기에서 한자리 차지할 자격을 확보한 셈이었다.
그러나 전후문협의 활동내용은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1961년 5월25~26일 개최 예정인 제3회 문학강연회가 신문(경향신문 1961년 5월15일)에 보도되었을 뿐이다. 첫날엔 박이문(‘문학상의 현대인간상’)·민재식(‘시와 현실’)·이문희(‘문장론’) 등이, 다음날엔 이어령(‘현대에 있어서의 문학적 상황’)·신동문(‘시작과 체험’)·최인훈(‘현대인과 소설’) 등이 강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5·16쿠데타로 인해 행사는 불발로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 전후문협 주최의 행사가 더 있었을 테지만,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여러 단체들은 1961년 6월 군사정권의 포고령에 의해 모두 해산되고, 그해 말 정부 당국의 종용에 따라 ‘한국문인협회’(문협)라는 통합단체로 새로 출범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삽화적인 것이지만, 해방 직후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와 이름이 같은 ‘청년문학가협회’(청문협)도 잠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알다시피 1960년대 들어 김승옥·서정인·이청준·박태순·최하림·이성부·이근배·정현종·조태일·김현 등 흔히 4·19세대라고 불리는 문인들이 대거 문단에 나왔다. 이들 가운데 김승옥·김현·최하림을 중심으로 동인지 ‘산문시대’(1962~1964)가 간행되고 조동일·임중빈 등 현실참여를 주장하는 평론가 중심의 동인 ‘비평작업’(1963)이 발족했다. 이런 흐름들이 1967년쯤 하나의 단체로 모인 것이 말하자면 청문협이었다.
당시의 유인물을 보면 청문협은 시인 이근배를 총무 겸 대표간사로 하여 임중빈(섭외)·조동일(기획)·염무웅(출판)·김광협(권익)·이탄(시분과)·김승옥(소설분과)·김현(평론분과) 등으로 간사단을 구성하고 가끔 모임을 가지는 한편 등사판으로 자료집을 만들어 두세 차례 공개적인 세미나를 열었다. 그런데 1968년 여름 소위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이 터지고 청문협이 통혁당 산하조직이라고 대문짝만 하게 보도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임중빈 주도 아래 공산주의에 입각한 비판적인 문학활동을 했다는 것이 중앙정보부의 발표였다. 터무니없는 내용이었지만, 청문협은 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전후문협도 청문협도 정치적 외압으로 꺾인 셈인데, 그러나 생각해보면 1970년대 이후 전개된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한국작가회의의 전신) 중심의 저항적 문학운동은 이런 활동들의 축적 위에서 성장한 것이었다.
■문인 등용문이 된 문예지 잇단 창간
근대문학의 성립은 인쇄매체의 발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발표 지면의 성격이 문학의 방향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종종 볼 수 있는 사례이다. 1949년 8월의 월간 ‘문예’ 창간과 한국문학가협회 창립 사이의 연관을 주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휴전 이후 첫 문예지는 오영진·박남수 등 월남문인들이 주관한 ‘문학예술’이었다. 하지만 1954년 4월 창간호가 난관에 부딪혀 중단되고 이듬해 6월에야 속간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나마 경제난으로 1957년 12월호로 결국 막을 내렸다. ‘문학예술’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음에도 외국문학을 적극 소개하고 이호철·송병수·박희진·신경림·유종호 등 유능한 신인들을 문단에 배출함으로써 잊지 못할 이름이 되었다.
1955년 1월 창간된 ‘현대문학’은 지금까지 단 한 번의 결호도 없이 통권 740호째 발행되고 있는 그야말로 한국의 대표적 문예지다. 이 잡지의 성격과 방향에 토대를 놓은 사람은 자타가 공인하듯 평론가 조연현이었다.
그가 ‘순수문학’ 진영의 사령탑이었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럼에도 그는 잡지 편집에서만은 나름으로 공정을 기했다. 경향을 달리하는 수많은 문인들이 ‘현대문학’ 지면에서 활동했는데, 그런 포용성이 이 보수체질 잡지의 장수를 담보했을 것이다.
‘자유문학’은 1956년 6월 자유문협의 기관지로 출발한 잡지다. 하지만 5·16으로 문인단체들이 해산됨에 따라 발행인 김광섭 명의의 자유문학사로 독립했다. 최인훈의 <가면고>(1960년 7월호)나 남정현의 <너는 뭐냐>(1961년 3월호)처럼 자기 잡지 출신 작가들의 중편을 과감하게 싣는 의욕적인 편집에도 불구하고 경제난이 가중돼 1963년 8월 통권 70호로 종간되었다.(후략)
염무웅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경향신문, 2016년 8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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