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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 [염무웅의 해방 70년, 문단과 문학 시대정신의 그림자](1) 찰나의 ‘환희’…긴 ‘환멸’이 싹 튼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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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2-01 23:01 조회32,8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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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들의 눈물과 분열
                                                  
일제강점기 말 ‘매일신보’의 중국 베이징 지사장으로 근무하던 백철(1908~1985)은 1945년 6월 중순 일본군 보도실에 들렀다가 독일 베를린이 소련군에게 함락되는 장면이 찍힌 기록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전쟁의 종말이 다가왔음을 실감한 그는 우선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8월2일이었다. 그는 매일 한 차례씩 본사로 나가고 있었는데, 14일 오후에 들렀을 때는 “내일 정오 중대발표가 있다”면서 기자들이 수군거리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8월15일, 하늘은 맑고 날씨는 더웠다. 백철은 신문사 편집실에서 사원들과 함께 라디오 앞에 둘러앉았다. 정오가 되자 일왕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결국 투항이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 거다!”라고 소리쳤다. 교정부의 한 노인은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곧 이어서 그동안 차단되어 있던 국제뉴스들이 통신을 통해 들어왔다. 제일 중요한 것은 적절한 시기에 조선을 독립시키기로 한다는 얄타회담의 내용이었다. 그 뉴스는 순식간에 외부로 퍼져나갔고, 시내는 당장 독립이라도 닥친 듯 흥분의 도가니로 변하고 있었다.


■은둔했던 문인들, 눈물로 광복을 맞다


그러나 평양은 분위기가 아주 달랐다. 소련군의 참전 이후 매일 수많은 일본인 피란민들이 열차편으로 실려 오고, ‘요시찰’ 딱지가 붙은 청년들은 헌병대에 잡혀갔으며, 조만식·오윤선 등 평안도 지역의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시골로 피신을 했다. 거리는 술렁거리고 민심은 불안으로 긴장해 있었다. 그런 가운데 15일 아침에는 거리 곳곳에 중대방송을 알리는 포스터가 나붙었다. 오윤선의 아들인 극작가 오영진(1916~1974)은 몇몇 동지들과 함께 안방에서 라디오 앞에 앉았다. 방송이 끝나자 그는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안방에서 사랑으로, 사랑에서 안방으로 들락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공연히 히죽거리며 밖으로 나가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악수를 건넸다.
 

한반도의 남쪽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당시 김동리(1913~1995)는 문학활동을 접은 채 경남 사천군 양곡조합 서기로 취직해 있었다. 그날도 조합에 나갔더니 정오에 중대방송이 있으므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조합 사무실에 앉아 일왕의 녹슨 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뜰에 깔리는 눈부신 햇빛을 멍하니 내다보았다. 그러고는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간신히 가누어 집으로 돌아왔다. 툇마루에 걸터앉자 뜨거운 눈물이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산골은 형편이 또 달랐다. 예술성 높은 단편소설의 작가로 이름이 높던 이태준(1904~?)은 강원도 철원 근처 소읍으로 내려가 낚시질로 소일하고 있었다. 라디오는 없고 신문도 2, 3일 지나야 들어오는 곳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날을 지나쳤고, 이튿날 아침에야 친구한테서 ‘긴급 상경’ 전보를 받았다. 철원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마주 오는 버스와 만난 두 운전수가 창을 열고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야 비로소 이태준은 전쟁이 끝났다는 막연한 소식을 들었다. 그는 코허리가 찌르르해져 좌우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승객들은 모르는 체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는 철원에 와서 신문을 보고서야 사태를 확인했으며 소리 내어 울었다. 하늘에는 박꽃 같은 구름송이, 땅에는 우거진 녹음, 그는 어느 것에나 대고 절하며 소리 지르고 날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염상섭(1897~1963)은 그날을 압록강변의 중국 국경도시 안동(현재의 단둥·丹東)에서 맞았다. 그는 신경(현재의 창춘·長春)에서 1937년 창간된 ‘만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다 2년 만에 그만두고 안동으로 와서 건설회사 홍보담당 직원 노릇을 하고 있었다. 날씨가 더운 탓에 그는 방에 앉아서도 연신 땀을 흘리며 라디오를 들었다. 몇 집 건너 사는 늙은 일본인도 라디오가 고장 났다며 와서 함께 들었다. 방송이 끝나자 일본인은 훌쩍거리며 돌아가고 염상섭만 혼자 남아 꺼이꺼이 울었다. 그날 그는 안동 거주 조선인 자치단체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8·15 한 달 만에 갈라선 문단


1930년대의 한국문학은 여러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크게 융성하고 있었다. 앞에 열거한 염상섭·이태준·백철·김동리·오영진은 그 주역에 속한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먹구름이 다가오자 문단은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일부 문인들은 군국주의 전시체제의 찬양에 앞장섰지만, 다른 문인들은 문학현장을 떠나 침묵과 은둔을 택했다. 따라서 ‘적극적 친일파’ 이외의 대부분 문인들에게 8·15는 감격 그 자체였다. 몸이 어느 곳에 있든 마음은 모든 이념적 차이를 뛰어넘어 일치된 해방감을 경험했다. 그 감격의 순간을 문단적 조직으로 구체화하기 위해 맨 먼저 움직인 사람은 임화(1908~1953)였다. 그는 8월15일 저녁 김남천(1911~1953)·이원조(1909~1955) 등 카프계 문인들과 접촉했고 이튿날 새벽부터는 유진오(1906~1987)를 필두로 이태준 등 여러 문인들과 계파를 초월하여 연합하는 길을 모색했다. 이 무렵 풍경을 다시 백철의 증언으로 들어보자.

 

1946년 3월13일 서울 종로구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발표된 ‘전조선문필가협회 결성대회 취지문’(정선태·김현식 공편 <‘삐라’로 듣는 해방 직후의 목소리>, 2011). 소명출판 제공
1946년 3월13일 서울 종로구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발표된 ‘전조선문필가협회 결성대회 취지문’(정선태·김현식 공편 <‘삐라’로 듣는 해방 직후의 목소리>, 2011). 소명출판 제공
 
그는 16일 오후 6시쯤 신문사를 나와 동대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전차 사정이 좋지 않아 안암동 집까지 걸어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화신백화점 앞에 이르러 소설가 박태원(1909~1986)이 군중들 틈에 섞여 벽보를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함께 벽보를 읽었다. 거기에는 “격(檄)! 전 문학인에게 알린다”는 제목 아래 내일 오전 10시 모처로 모이자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다음날 오전 백철은 가던 길에 방금 상경한 이태준과 김남천을 우연히 만나 함께 지정된 장소로 향했다. 원남동 어느 건물 2층에는 벌써 중견문인 30여명이 모여 있었고, 일행이 들어서자 환성과 박수로 맞아주었다. 이원조의 사회로 진행된 회의에서 임화가 작성한 선언문은 몇 개의 문구 수정으로 박수 속에 채택되고, 이어서 임시집행부 명단이 나왔다. 이때 뜻밖에도 이태준이 일어나 “일본놈 때도 출세를 하고 해방됐어도 또 선두에 서다니… 이럴 수가 있느냐”면서 유진오와 이무영(1908~1960)을 대놓고 지목했다. 결국 두 사람은 자리를 뜨고 말았다.


원남동 집회에서의 이 불협화는 그러나 큰 분열의 아주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8월18일 종로 한청빌딩의 ‘조선문인보국회’ 자리에 ‘조선문학건설본부’(문건) 간판을 달면서 임화가 구상한 것은 조선 문인의 대동단결, 즉 통합적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구상은 초장부터 좌우의 협공으로 온전하게 실현되기 어려움이 드러났다. 박종화(1901~1981)·김광섭(1905~1977)·이헌구(1905~1983) 등 흔히 민족주의적이라고 알려진 보수적 문인들은 임화 일파의 움직임을 카프의 재건 책동으로 간주하고 9월18일 ‘중앙문화협회’라는 대립적 단체를 만들었다.(후략)


염무웅 문학평론가

(경향신문, 2016년 1월 27일)


기사 전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1272109165&code=2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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