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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렬] ‘황우석 사건’ 그 후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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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11-27 15:45 조회32,5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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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조작이 밝혀진 지 10년이 지났다. “줄기세포는 없다”는 노성일 원장의 선언이 있기 전까지 한국 사회는 보수진보 구분 없이 황우석 박사에게 열광했다. 언론은 그의 행적을 연일 대서특필했고, 대통령을 비롯한 여당 정치인은 그를 한국 최고의 인물로 떠받들었고, 대통령을 국가의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았던 야당 정치인도 너 나 할 것 없이 황우석 박사와 손을 잡고 함께 사진을 찍으려 했다. 황우석 박사는 그야말로 권력 중의 권력이었다. 이 비정상적 열광의 분위기에서 몇 안되는 비판자들은 처음엔 무시당했고, 그 다음에는 매도당했고, 마지막에는 생명의 위험까지 느껴야 했다.

필자도 황우석 박사의 복제배아 줄기세포 발표 직후 어느 토론회에서 난자의 출처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가 그로부터 “정말로 성스럽고 감사한 열여섯 분의 여성난자 (기증) 동의자들께 인격적 모멸을 주는 단어” 사용을 자제하라는 경고를 들었다. 신문 글에서 난자 제공을 위해 “자기 몸까지 열어 줄 여성이 제 발로 찾아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했을 때는 어느 남성 과학자에게서 여성 전체에 대한 용서받을 수 없는 성희롱이라는 비난을 들었다. 비판적인 한두 마디 말에 대해서도 이러한 비난이 돌아왔는데, 당시에 진실을 밝히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이들은 단신으로 사지를 헤매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당시 그 끔찍했던 때를 떠올리면서 지금 그 일이 일어난다면 어떠할 것인지 생각해본다. 그때는 대통령이 황우석 박사의 연구에 몸이 감전될 정도로 열광해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기에 왜곡과 압력을 통해서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방해했지만, 그래도 민주주의가 죽지 않았기에 진실은 밝혀졌고 우리 사회는 미몽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그 후 우리 사회는 성찰의 시간을 가지지 못한 채 두 사람의 ‘황빠’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 했고, 때가 조금 덜 묻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표를 던졌다.

그가 권력을 잡은 후 우리 사회는 너무 크게 변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대중의 열광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이용하려는 권력자의 욕심은 변하지 않았다. 황우석 박사가 뭔가 대단한 것처럼 보이는 연구를 가지고 나타난다면, 권력은 대중의 열광을 끌어내고 유지시키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비판은 철저하게 억눌려지고 보복당할 것이다. 자제하라는 경고를 넘어 검찰과 법정으로 불러내 합법을 가장한 해코지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언론을 조작해 비판의 소리가 아예 나오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PD수첩>은 어떤 제보가 들어와도 꼼짝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진실을 밝히려는 용기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처음에 나라의 영웅, 나라의 보배 중 보배를 깎아내리는 매국노 취급을 당할 것이고, 그래도 비판을 굽히지 않으면 전투적인 열광자들에게 둘러싸여 욕설과 폭행을 당하는 수모를 겪을 것이다. 지금의 권력은 소수의 열광자를 동원해서 다수를 억누르는 데도 뛰어난데, 몇몇 비판자를 처리하는 일쯤이야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야당이 편들어줄 것 같지도 않다. 10년 전 그 사건 후 그들은 반성의 시간을 갖지 않았고, 지금도 여러 사람이 황우석 박사를 돕고 있다.
(후략)

이필렬 방송대 문화교양학부 교수
(경향신문, 2015년 12월 25일)

기사 전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125203037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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