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염무웅의 해방 70년, 문단과 문학 시대정신의 그림자](2) 혼란과 자유 속 재건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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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3-09 15:04 조회32,09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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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자유란 이름의 ‘무질서’ 앞에서…그들은 붓을 고쳐들었다
미군의 인천 상륙 다음날인 1945년 9월9일,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통치권을 미군에 이양하였다. 이로써 38선 이남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군정이 공식 출범하였다. 하지만 20일이 지난 9월29일자 하지(John R Hodge) 사령관의 포고문을 보면 군정의 기능은 아직 서울·경기도와 부산까지만 미칠 뿐이고 일본군 무장부대의 해체는 한창 진행 중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지의 포고문에서 더 주목을 끄는 대목이 있다. 미군정이 검열을 폐지하고 “신문과 언론의 자유 확립”을 정책으로 채택할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한국 도입을 선포한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오랫동안 억압되어 있던 한국인들의 정치적 욕구는 해방과 동시에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다. 수많은 정치단체들이 난립하고 각종 집회와 행사가 이어졌으며 허다한 신문들이 출현했던 것이다. 당시의 한 책은 1945년 11월쯤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오늘 경성에만 6, 70 내지 근 100개의 정치단체와 20여개의 신문사가 출현하였으며 목하 계획 중에 있는 것도 부지기수라 한다. 과도기의 오늘 조선에 정치단체의 많음도 당연한 일이며 언론강압 밑에 있었던 우리로서 신문 기타 언론기관 경영에 착안함도 무리가 아니라 하겠으나….”(김종범·김동운 공저, <해방 전후의 조선 진상>, 1945·12)
출판사도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1945년 45개에 불과하던 것이 1946년에는 150개, 1947년에는 581개로 늘었으며, 1949년 3월에는 공보처에 등록된 출판사가 847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다른 한편, 정당과 정파들의 연쇄적 이합집산에 더하여 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혼란도 날로 악화되었다. 250만 해외귀환동포에 대한 주거·생계 대책 역시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미군정이 애초 구상한 자유민주주의는 계획대로 실현될 수 없음이 분명했다. 이미 1946년 5월부터 조선공산당 탄압이 시작되었고, 이에 대항하여 9월 총파업과 10월항쟁이 전개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극심한 물가고와 식량난이 있었다. 당시 유엔 사무총장 리(Trygve H Rie)는 미국 쪽 자료를 바탕으로 “남조선의 경제상태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가의 경제상태보다 더 악화된 것같이 보인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경향신문 1947년 10월23일자)했고, 이듬해에는 1월부터 7월 말까지 발진티푸스 등 전염병으로 남한에서만 무려 3만5000명이 사망했다는 보건당국의 통계가 보도(동아일보 1948년 10월1일자)되었는데, 이는 해방기 우리의 민중현실이 얼마나 처절한 것이었는지 웅변하는 사례이다. 이 시기 한국문학은 바로 이러한 현실의 산물이고 이 현실을 반영한다.
■은둔했던 작가들 문학현장으로 복귀
그러나 문학은 역사상 처음 맛보는 언론자유를 통해 유례없는 활력을 공급받았다. 일제 말 친일에 앞장섰던 이광수·주요한·김팔봉·최재서 등 일부 문인들은 붓을 꺾고 자중에 들어갔으나, 침묵과 은둔으로 숨을 죽였던 다수의 작가들은 현장으로 복귀했다. 우리말 문단의 소멸로 등단의 기회를 얻지 못했던 오영수·박연희·유주현·김성한·장용학·구상·김춘수·김수영·김동석 등 많은 신인들이 대거 창작세계에 합류한 것도 해방기 우리 문학의 재건을 과시하는 장면이었다. 남북분단의 고착화에 따라 적지 않은 문인들이 월북 또는 월남하는 비극 속에서도 한국문학은 전에 없는 양적 풍요와 강력한 현실성을 획득했고, 문단은 이념적 분열과 정치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국가보안법 제정(1948년 12월) 및 국민보도연맹 결성(1949년 6월) 이전까지는 그런대로 백화제방의 다양성을 자랑할 수 있었다.
이 독특한 시기에 활동을 재개한 선배세대 작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누구보다 염상섭일 것이다. 압록강 건너 중국 단둥에서 해방을 맞은 그는 그해 초겨울 신의주로 건너왔고 이듬해 봄에는 38선을 넘어 서울로 내려왔다. 타향살이 10년 만의 고단한 귀향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그랬던 것처럼 해방기에도 그는 언론계와 문단에서 공히 활동했다. 하지만 물론 그의 주된 업적은 문학에서 이루어졌다. 일제 말의 공백을 벌충하려는 듯이 그는 정력적으로 소설 창작에 몰두했고, 이와 함께 자신의 문학적 입장을 밝히는 논설도 적잖이 발표했다.
그런데 당시 문단에서 그를 주변부로 밀어냈던 요인이자 오늘의 눈으로 보아 그를 중시하게 만드는 이유는 그의 남다른 정치적 입장이다. 실상 그는 젊은 날부터 보수적인 논객으로 알려졌고, 박영희 같은 좌파 비평가와도 논전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편소설 <삼대>(1931)에 이르면 그는 초기의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사회주의에 대한 포용적 태도를 분명히 드러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신간회(1927~1931)의 좌우통합적 민족노선에 공명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하나의 문학작품으로서 <삼대>를 그의 또 다른 대표작 <만세전>(1924)과 비교하면 양자 간의 우열을 단순하게 말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의 역사의식이라는 면에서 <삼대>는 분명히 <만세전>으로부터의 발전을 보여준다. 하지만 작품의 예술적 성취를 따지자면 이념적 척도만이 아닌 다른 관점이 요구된다. 간단히 말해서 <만세전>은 <삼대>에 비해 훨씬 규모가 작고 서사적 구성도 단순하며 얼마간 미숙한 요소조차 지닌 작품이지만, 현실을 ‘외부적 관념에 의해 가공하지 않은’ 형태로, 즉 현실의 깊이와 복합성을 문학 고유의 직접적 방식으로 재현하고 있다는 실감을 주는 작품인 것이다.
해방기의 염상섭은 언론인으로서나 소설가로서나 좌우합작을 지지하는 편에 섰다. 당시 그의 생각은 가령 ‘사회성과 시대성의 중시’(백민, 1948년 5월)란 짤막한 글에 잘 요약되어 있는데, 그 글에서 그는 조선문학의 옳은 건설을 위해 ①일제 잔재의 청산 ②새로운 외세의 개입에 대한 경계 ③봉건적 관념과 구습의 타파 ④편협한 국수주의의 철폐와 자주적인 민족관의 수립 ⑤좌익문학을 무조건 배격할 것이 아니라 필요한 요소를 취할 것 등 다섯 항목을 주장하고 있다. 포용적이고 진취적인 민족주의자의 모습이 약여하다 하겠는데, 장편소설 <효풍>(1948)은 이 시기 염상섭의 이런 사상을 종합한 역작이다. (후략)
염무웅 문학평론가
(경향신문, 2016년 2월 22일)
기사 전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2222135145&code=2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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