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돈균] 알파고, 기술이 아니라 ‘인간’을 돌아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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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4-04 16:28 조회30,28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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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와 이세돌 9단 간에 벌어진 세기의 대국이 큰 화제다. 그러나 이 대국이 ‘세기의 대국’이 된 것은 처음부터 예상된 일은 아니었다. 4000여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바둑은 기계가 아직 넘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사고능력이 결부된 놀이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세돌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는 싱거운 ‘게임’이 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게임은 세기의 드라마, 아니 인류의 역사에 있어 가장 충격적인 순간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세간에는 마치 이미 이러한 드라마를 자신들이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갖가지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처음에는 로봇공학자들, 뇌과학자들, 신경의학자들의 얘기들이 주류더니 요즘에는 동물학자, 심리학자, 철학자들까지 나와서 이 사건을 화제로 삼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이런 얘기들의 방향이나 인터넷에 떠도는 대중들의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표면은 다양한 얘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대부분이 어떤 전제를 공유하면서 하는 비슷비슷한 얘기라는 생각이 든다. 답이 다양하지만 그 답이 전제로 삼고 있는 질문 자체는 의심해 보지 않는다고나 할까. 그것은 크게 보아 두 가지 다른 말로 표현되고 있지만 결국 같은 얘기가 되는 어떤 지점이다.
첫째 이런 얘기들은 주로 ‘로봇의 능력이 이제 인간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하거나 넘어서고 있다’는 식으로 얘기된다. 이것은 이 사건을 기본적으로 기술공학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데, 여기서 의심되지 않는 것은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는 생각이다. 이 인간의 고유성에 대한 이러한 집착은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주의(휴머니즘) 내에 있다. 이때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얘기되는 것들은 직관, 감정, 창의력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 고유의 신성불가침이라고 여기는 저것들은, 관점을 거꾸로 바꿔 놓고 보면 알파고가 고도의 데이터 연산능력을 가지고 사태를 판단하는 것처럼, ‘인간이라는 기계’가 지닌 고도의 데이터 연산능력 같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인간의 직관이나 감정이나 창의력은 그냥 순수하게 제 안에서 생기는 어떤 것이 아니며, 외부로부터 촉발된 반응을 자기가 가진 경험치와 지식에 맞추어 지각하고, 순간적으로 계산하고 파악하고 느끼고 판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주관성이란 객관성이 근거가 된 종합능력이지 그 자체로 외부 세계와 독립된 어떤 특이한 능력이 아니다. 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 역시 하나의 ‘기계’일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을 ‘기계’로 이해하는 이런 관점은 17세기 데카르트 철학 이래 이미 등장하고, 빅토리아 시대의 셰익스피어 비극 ‘햄릿’에도 나온다.
둘째 인문학자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로봇에게도 이제 윤리를 가르쳐야 한다’라는 식의 발언도 마찬가지다. 이런 발언의 역설은 ‘인간은 과연 윤리적인가’라는 반문을 하게 되면 바로 무력해진다.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이 불행한 정치·사회를 본다면 어쩌면 인간에게 윤리란 예외적인 상황으로까지 느껴지지 않는가. 인간에게 윤리란 무엇이고, 우리는 지금 윤리적인 삶을 구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 동반되지 않을 때, ‘로봇윤리’란 기계를 인간의 새로운 ‘노예’로 부리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인간주의적 규제장치에 불과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 (후략)
함돈균 문학평론가
(법보신문, 2016년 3월 23일)
기사 전문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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