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수] 하지 않은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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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5-09-22 21:55 조회35,02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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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다. 기다리는 버스는 좀체 오지 않고, 그는 상념에 빠진다. 헤어진 여자들의 기억이 하나 둘 두서없이 떠오르는데 회상은 이상하게 과천 언저리를 맴돈다. 지금 그의 인생은 별 볼 일 없는 상태다. 씁쓸하고 무력한 기억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소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문득, 함께 버스를 기다리다 차에 먼저 오르는 여고생들이 자신을 스쳐간 ‘그녀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녀들에게도 저렇게 재잘거리며 밤늦게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들이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 시간들은 어디로 갔을까. 생각은 조금 나아간다. 아니, ‘나’는 어떤 시간들을 지나서 지금 여기 밤의 정류장에 서 있는 것일까.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 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김종옥의 단편소설 ‘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들’ 이야기다.
제목에 일부 암시되어 있기도 하지만 소설 속 사내의 생각에 기대면, 우리의 현재를 규정하는 것은 ‘우리가 한 일들’이 아니라 ‘우리가 하지 않은 일들’일 수도 있다. 과거를 돌아보면 우리가 ‘한 일들’ 옆으로 ‘하지 않은 일들’이 줄줄이 떠오른다. 다른 선택의 가능성들. 우리는 대개 후회한다. 그때 왜 그러지 않았을까.
그러나 선택의 순간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은 확정할 수 없다. 그는 지금 그녀들에게 행하지 못한 무수한 사랑의 가능성들을 떠올리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을 후회할 수 있다. 하지만 결코 우리는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이 뭔지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것을 생각할 때, 그 무한한 일들을 떠올려볼 때, 나는 오히려 이상한 안도감을 느낀다.”
‘이상한 안도감’은 역설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다.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로, 하지 못한 일들이 현재의 우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후회의 감정보다 더 큰 쓰라림을 준다. 그러나 쓰라리면 쓰라린 대로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 지나오지 않은 시간과 함께 있다는 생각은 해볼 만 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모두 온전히 우리의 시간이 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홍상수 감독의 신작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우리의 시간 안에 잠재되어 있는 다른 가능성 안으로 들어가 그 접혀 있는 자리를 펼쳐보는 영화다. 영화 속 한 영화감독의 1박 2일의 행로는 두 번 되풀이되고, 우리는 ‘지금’과 ‘그때’ 사이에서 미묘하게 반복되고 어긋나는 행동과 말을 보고 듣는다. 영화가 시작되고 한 시간쯤 뒤 우리는 화성 행궁 앞에서 서성거리는 주인공을 다시 만나고 그의 시간을 다시 따라가게 된다. (후략)
정홍수 문학평론가
(한국일보, 2015년 9월 21일)
기사 전문 http://www.hankookilbo.com/v/38eb1cf62e644dc4af71cce088540e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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