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갑우] 정치적 중력은 오른쪽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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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5-07-13 18:22 조회34,66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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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20대 후반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유럽에서 쓴 텍스트 <공산당 선언>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잃을 것이라곤 족쇄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이다.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로 끝을 맺고 있다(<세계를 뒤흔든 공산당 선언>). 사회주의란 실험을 추동했던 선동적 텍스트의 말미는 도저한 낙관과 명령의 문장이다. 그 실험은 실패했다. 그들이 예측했던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는 등장하지 않았다. 텍스트의 오류와 오독 그 두 과오의 공통분모는 정치권력의 생산과 재생산, 권력의 민주화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었다.
2015년 6월 한국의 진보정당 정의당 대표 경선에 30대 후반의 한 청년이 출마했다. 조성주다. 그의 출마선언문을 읽은 후 “근래 5년간 이토록 내공과 영혼이 담긴 연설문을 처음 보았다”고 평한 안병진의 경향신문 글을 통해 그를 알게 되었다. 안병진은 조성주를 여야와 시민사회의 정치인인 박원순, 유승민, 손석희와 동급의 반열에 올렸다. 박상훈이 그 이전 경향신문 글에서 새누리당 원내대표 유승민의 연설을 “보수적이되 민주적이고 또 ‘정치적 이성’을 갖춘 말”로 평했을 때, 그 텍스트를 읽으려 했다. 조성주의 텍스트도 매혹의 대상이었다. 한국 정치에서 읽어야 하는 텍스트가 생겼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아버지는 인천에서 자동차 유리를 만드는 노동자였습니다.” 조성주 출사표의 신파처럼 보이는 첫 문장이다. 그러나 ‘개인’의 감성을 팔지는 않는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조합원이 된 아버지의 임금이 인상되면서 가족의 삶, 개인의 삶이 향상되었음을 말한다. “민주주의와 노동이 존중받는 세상을 위해 청춘을 바쳤던 선배 세대의 희생이 있었기”에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도 배울 수 있었”다는 예의도 있다. 그러나 선배들이 성취한 세상에 나왔을 때 청년실업, 비정규직, 가난한 영세 자영업자의 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민주화의 역설의 세상에서 “선배 세대가 이룬 민주주의의 바깥에서 철저히 고립”된 그는 “더 이상 지성의 전당도 민주화운동의 중추도 아”닌 대학에서 “당장의 등록금과 생계를 걱정하는 친구들과 함께 싸우”고, 그 “세대의 노동권을 위해” 기존 노동운동 밖에서 “세대별 노동조합인 ‘청년유니온’을 결성”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는 운동에서 정치로 도약한다. 좋은 진보정당이 없다면 지금 여기서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의 진화다. 이 대목에서 나는 읽기의 사슬을 만들었다. 사회주의란 이념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민주주의란 빈 공간에도 진입하지 못한 “민주주의 밖의 시민” “노동운동 밖의 노동”을 대표하겠다는 그의 말을 읽으며 <공산당 선언>을 떠올렸다. 그 텍스트의 끝 두 문장처럼 도저한 낙관과 명령을 보았기 때문이다. 대의제 민주주의하에서 계급투쟁이 제도화된 국가에서조차 진보정당은 압도적 다수로 정치권력을 장악하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사실상 다수로 가정되는 그들의 반계급투표가 이루어져왔다. 낙관과 명령은 ‘진정성’과 ‘실력’, 그것을 담지한 ‘정당’과 ‘지도자’가 있을 때 실현가능한 언술이다. (후략)
구갑우 북한대학원대 교수·정치학
(경향신문, 2015년 6월 28일)
기사 전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6282132375&code=990308
2015년 6월 한국의 진보정당 정의당 대표 경선에 30대 후반의 한 청년이 출마했다. 조성주다. 그의 출마선언문을 읽은 후 “근래 5년간 이토록 내공과 영혼이 담긴 연설문을 처음 보았다”고 평한 안병진의 경향신문 글을 통해 그를 알게 되었다. 안병진은 조성주를 여야와 시민사회의 정치인인 박원순, 유승민, 손석희와 동급의 반열에 올렸다. 박상훈이 그 이전 경향신문 글에서 새누리당 원내대표 유승민의 연설을 “보수적이되 민주적이고 또 ‘정치적 이성’을 갖춘 말”로 평했을 때, 그 텍스트를 읽으려 했다. 조성주의 텍스트도 매혹의 대상이었다. 한국 정치에서 읽어야 하는 텍스트가 생겼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아버지는 인천에서 자동차 유리를 만드는 노동자였습니다.” 조성주 출사표의 신파처럼 보이는 첫 문장이다. 그러나 ‘개인’의 감성을 팔지는 않는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조합원이 된 아버지의 임금이 인상되면서 가족의 삶, 개인의 삶이 향상되었음을 말한다. “민주주의와 노동이 존중받는 세상을 위해 청춘을 바쳤던 선배 세대의 희생이 있었기”에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도 배울 수 있었”다는 예의도 있다. 그러나 선배들이 성취한 세상에 나왔을 때 청년실업, 비정규직, 가난한 영세 자영업자의 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민주화의 역설의 세상에서 “선배 세대가 이룬 민주주의의 바깥에서 철저히 고립”된 그는 “더 이상 지성의 전당도 민주화운동의 중추도 아”닌 대학에서 “당장의 등록금과 생계를 걱정하는 친구들과 함께 싸우”고, 그 “세대의 노동권을 위해” 기존 노동운동 밖에서 “세대별 노동조합인 ‘청년유니온’을 결성”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는 운동에서 정치로 도약한다. 좋은 진보정당이 없다면 지금 여기서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의 진화다. 이 대목에서 나는 읽기의 사슬을 만들었다. 사회주의란 이념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민주주의란 빈 공간에도 진입하지 못한 “민주주의 밖의 시민” “노동운동 밖의 노동”을 대표하겠다는 그의 말을 읽으며 <공산당 선언>을 떠올렸다. 그 텍스트의 끝 두 문장처럼 도저한 낙관과 명령을 보았기 때문이다. 대의제 민주주의하에서 계급투쟁이 제도화된 국가에서조차 진보정당은 압도적 다수로 정치권력을 장악하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사실상 다수로 가정되는 그들의 반계급투표가 이루어져왔다. 낙관과 명령은 ‘진정성’과 ‘실력’, 그것을 담지한 ‘정당’과 ‘지도자’가 있을 때 실현가능한 언술이다. (후략)
구갑우 북한대학원대 교수·정치학
(경향신문, 2015년 6월 28일)
기사 전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6282132375&code=99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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