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수] 상투적인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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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5-08-12 12:08 조회34,97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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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1961년 예루살렘 법정에서 열린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방청하면서 그의 말과 생각이 온통 상투성으로 뒤덮여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바 있다. 아이히만은 나치에 의해 주입된 선전 문구나 관청 용어 같은 공허하고 판에 박힌 말들을 지겹도록 반복하면서 자신은 유대인 절멸 정책의 한 톱니바퀴였을 뿐이었다고 강변한다. 심지어 그는 교수대 앞에서까지 자신의 생각, 자신의 느낌으로 이루어진 말 대신 언젠가 남의 장례식장에서 들었을 법한 언설을 늘어놓는다. 지금 닥친 일이 자신의 죽음,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듯이 말이다.
한나 아렌트는 여기서 ‘어리석음’과는 구별되는 ‘순전한 무사유’를 보며, 악과 사유할 능력을 잃어버린 무사유 사이의 이상한 연관성이야말로 아이히만 재판에서 끌어내어야 할 역사적 교훈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유할 능력’이 인간 내부의 또 다른 영역인 자아와의 대화이자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이며, 말의 능력으로서 인간의 인간다움이 여기에 기초한다는 사실은 굳이 어려운 논의를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닐 테다.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년)의 부제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인데, 흔히 ‘평범성’으로 번역되는 ‘banality’가 진부한 말과 생각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것은 기억해둘 만한 지점인 것 같다.(후략)
정홍수 문학평론가
(한국일보, 2015년 8월 10일)
기사 전문 http://www.hankookilbo.com/v/254395aee84f4e6e856cb8dfc913c0f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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