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평화의 그림 뒤에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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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5-08-12 12:14 조회34,51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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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 결과 미국은 “일본이 반세기 가까이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떠맡았던 문제와 책임을 물려받게” 되었다는 것이, 냉전의 입안자로 알려진 조지 케넌의 주장이다. 오바마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이 미 외교사의 어떤 맥락에 닿아 있는 것인지 짐작하게 된다.
여러 번 외침을 당한 우리와 달리 일본은 역사상 한 번도 변고를 겪지 않았다. 그런 행운은 아마 세계에 유례가 없을 것이다. 딱 한 번, 13세기 말 몽골과 고려 연합군의 침공이 있었으나 때마침 불어온 태풍으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니 70년 전 이맘때 연일 퍼붓는 폭격으로 도시가 파괴되고 마침내 외국군의 점령통치를 받게 된 사태는 일본인들에게는 초유의 참변이자 미증유의 시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은 오래가지 않았다. 유럽의 패전국 독일(서독)과 마찬가지로 일본이 잿더미에서 일어나 부흥을 이룩하는 데는 채 20년도 걸리지 않았다. 1964년의 도쿄올림픽은 일본을 위한 축제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양국 국민들의 남다른 근면, 축적된 과학기술과 산업적 기반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유리한 국제정치의 환경이 무엇보다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종전과 더불어 시작된 미-소 냉전이야말로 독일과 일본에는 악몽으로부터의 구원이었다.
20세기 후반의 세계사를 이해하는 핵심어 중의 하나가 ‘냉전’이고, 그 냉전의 입안자로 알려진 인물이 조지 케넌(1904~2005)이다. 그는 일찍이 미국 국무부 직원으로 들어가 독일과 소련 등지에 근무하면서 히틀러와 스탈린의 통치를 현지에서 지켜보고 세계대전의 발발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외교관이 아니라 “미국 대외정책에 관해 중요하면서도 원대한 질문을 던지는 재능을 지닌 일류 전략사상가”였다.(케넌의 책 <미국 외교 50년>에 붙인 존 미어샤이머 교수의 서문) 종전 직후 그는 마침 모스크바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때 미국은 2차대전의 동맹국 소련을 이제부터 어떻게 대하는 것이 옳을지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1946년 2월 소련의 최근 행동을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소련 주재 대사관에 보냈고, 케넌은 ‘긴 전문’으로 이에 답했다. 이 전문에 개진된 그의 견해가 바로 유명한 ‘트루먼 독트린’(1947.3)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전문의 내용을 보완해서 가명으로 발표한 논문이 ‘소련 행동의 원천’이고, 그로부터 4년 후 한 대학에서의 연속강연을 정리한 글이 <미국 외교 50년>이다. 물론 지금 우리가 케넌의 당시 생각에 관심을 갖는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의 관점이 미국 대외정책의 바탕 속에 현재형으로 살아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케넌이 보기에 20세기 미국의 안보가 의존하는 몇 가지 근본요소가 있는데, 그중 결정적인 것은 “역사의 많은 시기에 걸쳐 우리의 안보가 영국의 위치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는 ‘미-영 공동운명체론’이다. 그런 입장에서 그는 독일이든 소련이든 단일한 강국이 유럽 전체를 지배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 즉 유럽대륙에 적절한 세력균형이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 미국 안보에 필수적이라고 본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 유럽에서는 오직 소련만이 압도적 강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그는 판단했다. 그리하여 케넌은 소련 권력의 작동방식에 대한 나름의 분석을 토대로 미국이 ‘확고한 봉쇄정책’으로 나가야 하며 이 봉쇄정책은 소련이 세계 평화와 안정을 해치려는 조짐을 보일 때마다 예외 없이 반격에 직면하도록 완벽하게 설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케넌의 관점에서 영국의 역할을 맡은 동아시아 국가는 일본이다. 그는 20세기 들어 미국의 정책이 아시아대륙에서의 일본의 이익을 좌절시키는 쪽으로 점차 옮겨간 데에 의문을 제기한 국무부 내 소수의견에 공감한다. 패전의 결과 일본이 ‘섬나라’로 위축됨으로써 미국은 일부 외교관들이 우려했던 대로 “일본이 반세기 가까이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맞닥뜨리고 떠맡았던 문제와 책임을 물려받게” 되었다는 것이 케넌의 주장이다.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몰아냄으로써 결국 그 자리에 소련을 불러들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소련 해체 이후 과도기를 거친 다음의 새로운 현실, 즉 중국의 부상이라는 21세기 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오바마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이 미국 외교사의 어떤 맥락에 닿아 있는 것인지 짐작하게 된다. 두말할 것 없이 케넌의 발상은 미국 패권주의를 전제로 한다. 이 발상에서는 미국을 정점으로 지역 내 여러 나라의 위계질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세계 평화의 필수조건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지역 국가들은 미국의 명시적 또는 암시적 지휘에 따라 각자의 서열에 걸맞게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역량을 배치하는 것이 정책의 최고 임무로 간주된다. 아마 이것이 세계 패권제국으로서의 미국 주류세력의 평화구도일 것이다. 그런데 이 구도가 최우선적으로 보호하는 것은 상층 자본가들의 탐욕이 ‘평화적으로’ 실현되는 체제다. 이 체제 속에서 자본주의는 한없이 발전할 것이 기대되고, 자본주의의 저변으로서 민중은 미국에 살든 방글라데시에 살든 종속적 삶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거의 대대손손 박탈당한다. 1%에게 낙원인 곳에서 99%는 지옥의 문턱을 넘나들도록 설계된 것이 그 체제인 것이다.
물론 이 체제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서구 강대국들이 자기들 나름의 꿈의 실현을 위해 수백년 피땀 흘려 애써온 것은 안으로는 산업화, 밖으로는 식민지 개척이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세계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을 우리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근대의 탄생이라 부르는데, 일본은 19세기 후반 뒤늦게 이 대열에 참가하여 서구 바깥의 국가로서는 유일한 성공사례가 되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 예외적 성공을 위한 희생으로 우리는 반세기 가까운 식민지 침탈의 고통을 겪은 것이다.
해묵은 과거사를 되짚어 보는 까닭은 그것이 단지 어제의 일이 아니라 오늘 우리 삶의 문제에 절실하게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이웃으로서 일본과 대등하고 적절한 선린관계를 맺고 지내야 할뿐더러 미국·중국 등과도 진정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열어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언론에 되풀이 보도된 바와 같이 일본 아베 정권은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해서는 미국 등에 거듭 사과했지만, 식민지 지배와 이에 따른 각종 피해에 대해서는 지난날의 무라야마 담화조차 계승할 뜻이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최근 일본의 전쟁기업 미쓰비시 머티리얼이 전시에 강제노역에 동원했던 미국·중국인들에게는 사과와 보상의 뜻을 밝혔지만, 한국인 피해자들에게는 “법적 상황이 다르다”며 이를 거부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후략)
염무웅 문학평론가
(한겨레신문, 2015년 8월 6일)
기사 전문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03409.html
하지만 고통은 오래가지 않았다. 유럽의 패전국 독일(서독)과 마찬가지로 일본이 잿더미에서 일어나 부흥을 이룩하는 데는 채 20년도 걸리지 않았다. 1964년의 도쿄올림픽은 일본을 위한 축제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양국 국민들의 남다른 근면, 축적된 과학기술과 산업적 기반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유리한 국제정치의 환경이 무엇보다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종전과 더불어 시작된 미-소 냉전이야말로 독일과 일본에는 악몽으로부터의 구원이었다.
20세기 후반의 세계사를 이해하는 핵심어 중의 하나가 ‘냉전’이고, 그 냉전의 입안자로 알려진 인물이 조지 케넌(1904~2005)이다. 그는 일찍이 미국 국무부 직원으로 들어가 독일과 소련 등지에 근무하면서 히틀러와 스탈린의 통치를 현지에서 지켜보고 세계대전의 발발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외교관이 아니라 “미국 대외정책에 관해 중요하면서도 원대한 질문을 던지는 재능을 지닌 일류 전략사상가”였다.(케넌의 책 <미국 외교 50년>에 붙인 존 미어샤이머 교수의 서문) 종전 직후 그는 마침 모스크바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때 미국은 2차대전의 동맹국 소련을 이제부터 어떻게 대하는 것이 옳을지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1946년 2월 소련의 최근 행동을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소련 주재 대사관에 보냈고, 케넌은 ‘긴 전문’으로 이에 답했다. 이 전문에 개진된 그의 견해가 바로 유명한 ‘트루먼 독트린’(1947.3)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전문의 내용을 보완해서 가명으로 발표한 논문이 ‘소련 행동의 원천’이고, 그로부터 4년 후 한 대학에서의 연속강연을 정리한 글이 <미국 외교 50년>이다. 물론 지금 우리가 케넌의 당시 생각에 관심을 갖는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의 관점이 미국 대외정책의 바탕 속에 현재형으로 살아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케넌이 보기에 20세기 미국의 안보가 의존하는 몇 가지 근본요소가 있는데, 그중 결정적인 것은 “역사의 많은 시기에 걸쳐 우리의 안보가 영국의 위치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는 ‘미-영 공동운명체론’이다. 그런 입장에서 그는 독일이든 소련이든 단일한 강국이 유럽 전체를 지배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 즉 유럽대륙에 적절한 세력균형이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 미국 안보에 필수적이라고 본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 유럽에서는 오직 소련만이 압도적 강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그는 판단했다. 그리하여 케넌은 소련 권력의 작동방식에 대한 나름의 분석을 토대로 미국이 ‘확고한 봉쇄정책’으로 나가야 하며 이 봉쇄정책은 소련이 세계 평화와 안정을 해치려는 조짐을 보일 때마다 예외 없이 반격에 직면하도록 완벽하게 설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케넌의 관점에서 영국의 역할을 맡은 동아시아 국가는 일본이다. 그는 20세기 들어 미국의 정책이 아시아대륙에서의 일본의 이익을 좌절시키는 쪽으로 점차 옮겨간 데에 의문을 제기한 국무부 내 소수의견에 공감한다. 패전의 결과 일본이 ‘섬나라’로 위축됨으로써 미국은 일부 외교관들이 우려했던 대로 “일본이 반세기 가까이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맞닥뜨리고 떠맡았던 문제와 책임을 물려받게” 되었다는 것이 케넌의 주장이다.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몰아냄으로써 결국 그 자리에 소련을 불러들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소련 해체 이후 과도기를 거친 다음의 새로운 현실, 즉 중국의 부상이라는 21세기 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오바마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이 미국 외교사의 어떤 맥락에 닿아 있는 것인지 짐작하게 된다. 두말할 것 없이 케넌의 발상은 미국 패권주의를 전제로 한다. 이 발상에서는 미국을 정점으로 지역 내 여러 나라의 위계질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세계 평화의 필수조건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지역 국가들은 미국의 명시적 또는 암시적 지휘에 따라 각자의 서열에 걸맞게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역량을 배치하는 것이 정책의 최고 임무로 간주된다. 아마 이것이 세계 패권제국으로서의 미국 주류세력의 평화구도일 것이다. 그런데 이 구도가 최우선적으로 보호하는 것은 상층 자본가들의 탐욕이 ‘평화적으로’ 실현되는 체제다. 이 체제 속에서 자본주의는 한없이 발전할 것이 기대되고, 자본주의의 저변으로서 민중은 미국에 살든 방글라데시에 살든 종속적 삶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거의 대대손손 박탈당한다. 1%에게 낙원인 곳에서 99%는 지옥의 문턱을 넘나들도록 설계된 것이 그 체제인 것이다.
물론 이 체제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서구 강대국들이 자기들 나름의 꿈의 실현을 위해 수백년 피땀 흘려 애써온 것은 안으로는 산업화, 밖으로는 식민지 개척이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세계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을 우리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근대의 탄생이라 부르는데, 일본은 19세기 후반 뒤늦게 이 대열에 참가하여 서구 바깥의 국가로서는 유일한 성공사례가 되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 예외적 성공을 위한 희생으로 우리는 반세기 가까운 식민지 침탈의 고통을 겪은 것이다.
해묵은 과거사를 되짚어 보는 까닭은 그것이 단지 어제의 일이 아니라 오늘 우리 삶의 문제에 절실하게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이웃으로서 일본과 대등하고 적절한 선린관계를 맺고 지내야 할뿐더러 미국·중국 등과도 진정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열어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언론에 되풀이 보도된 바와 같이 일본 아베 정권은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해서는 미국 등에 거듭 사과했지만, 식민지 지배와 이에 따른 각종 피해에 대해서는 지난날의 무라야마 담화조차 계승할 뜻이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최근 일본의 전쟁기업 미쓰비시 머티리얼이 전시에 강제노역에 동원했던 미국·중국인들에게는 사과와 보상의 뜻을 밝혔지만, 한국인 피해자들에게는 “법적 상황이 다르다”며 이를 거부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후략)
염무웅 문학평론가
(한겨레신문, 2015년 8월 6일)
기사 전문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034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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