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렬] 공무원이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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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5-10-06 15:30 조회34,98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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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느 심포지엄에서 서울시의 마을공동체 만들기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다. 공동체 만들기라고 하니 뭔가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을 법도 하지만, 내가 이해하거나 기대하는 바는 이웃끼리 조금씩 양보하고 배려하는 동네 만들기 정도로 소박한 것이다. 그래서 동네길 주차 때 승강이가 덜 벌어지고, 소음 때문에 위아래층 이웃끼리 싸우는 일이 적어지는 동네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서울시의 책임자가 이야기하듯 마을 주민들이 모임을 꾸리고, 마을 기업이 여기저기에서 솟아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쪽에서는 그런 움직임이 일어난다고 해도, 양보와 배려가 가능해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지 않으면 다른 한쪽에서는 여전히 주차, 소음, 운전경쟁 등으로 다투는 일이 벌어진다. 자동차 두 대가 만나면 한 대는 멀리 후진해야 하는 좁은길에서 양보와 배려가 싹트기는 쉽지 않다. 이 길이 두 대가 조심조심 엇갈려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는 넓혀져야만 그게 가능해지는 것이다.
좁은 길을 넓히는 일은 마을 주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주민들이 제안은 할 수 있지만, 관청에서 움직여야만 가능하다. 이런 제안은 보통 민원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일선 공무원에게 전달되고, 대부분 검토해보겠다는 등의 관례적인 답변이 이루어짐으로써 종결된다. 담당자들은 그것 하나가 동네 주민들의 삶을 조금 덜 피곤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마을만들기 같은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주민들은 한두 번 더 제안을 해보지만 매번 비슷한 답변만 듣고 결국 체념한다.
심포지엄에서 서울시 책임자는 이렇게 일선 공무원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마을만들기가 성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아리송하게 답하고 넘어갔다. 주민은 책임을 지지 않지만 공무원은 감사를 받고 책임을 져야 하니 이해하라는 식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마을만들기 활동가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주민들이 덜 피곤한 ‘마을살이’를 위해 대면해야 하는 상대는 그들이 아니라 공무원이다. 공무원의 관심과 이해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마을만들기는 좌초할 가능성이 크다.
내가 사는 북악산 뒤 동네에는 한두 해 전 구청에서 대지를 사들여 건설한 주차장이 있다. 그런데 이 주차장이 도시계획상의 도로를 크게 침범했다. 맞은편 주택 소유주가 그동안 자기 대지의 상당 부분을 도로로 내주었기에 통행에는 지장이 없지만, 이제 그 땅을 찾아야 할 사정이 생겼다. 문제는 이럴 경우 이 길이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아진다는 것이다. 동네에서 산 지가 40년도 넘은 그분에게는 이게 큰 고민거리다. 땅을 찾으면 동네 주민들이 크게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해결은 간단하다. 구청이 침범해서 주차장으로 만들어버린 도로를 내놓기만 하면 된다. 동네 주민이 구청에 이 사실을 알려주었지만, 구청은 요지부동이다. 담당 공무원은 현황대로 건설한 것이다, 관할이 아니다, 측량을 해봐야 한다, 시정하려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답변으로 일관한다.(후략)
이필렬 방송대·문화교양학부 교수
(경향신문, 2015년 9월 30일)
기사 전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930203627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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