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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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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3-11-03 16:40 조회2,4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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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수영의 새로운 민주주의

‘복사씨…’ 세계가 생각나는 요즘


저 씨알들이 가진 건 혐오가 아니다

새잎을 틔울 경이와 설렘뿐이다

그것이 없는 민주주의는 위태롭다


히틀러와 나치 일당의 유대인 혐오는 그들의 영혼에서 작동하는 원자로였다. 나치의 유대인 혐오가 학대와 학살로 이어진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우생학적 사고에 입각한 ‘비생산적 인간’에 대한 학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장애가 있는 어린이들을 ‘소독작업’이라는 규정 아래 가스나 독극물 또는 총으로 쏴 죽이거나 굶겨 죽인 것이다. 이른바 ‘최종 해결’이라는 유대인 학살을 유대인 혐오 하나로 설명하기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히틀러는 “강자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약자를 파괴하는, 자연의 인간성”을 공공연하게 말해왔으며, 1929년 뉘른베르크 나치 전당대회에서 이것은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밝히기도 했다.


유대인 학살에 대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시각은 깊은 통찰의 빛을 던져준다. 바우만은 서구 사회에 면면히 흘러왔던 반유대주의가 히틀러라는 악마를 통해 폭발한 것이 아니라, 홀로코스트 자체가 근대문명의 필연이라고 본다. 바우만에 따르면 “홀로코스트는 우리의 합리적인 현대 사회에서, 우리 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단계에서, 그리고 인류의 문화적 성취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태동해 실행”된 것이다. 얼핏 들으면 ‘우리 모두 죄인’이라는 두루뭉술한 양심적 가책을 가능하게 하는 발언이지만, 문제의 원인을 단순하게 보려는 습성은 본질을 사고하지 않으려는 나태와 편의주의 때문이며 동시에 나태와 편의주의를 낳기도 한다.


히틀러가 바그너의 게르만 신화에 빠진 바그너주의자였다는 사실은 히틀러가 철저한 근대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은폐하곤 한다. 즉 히틀러는 근대적 이성을 결여한 광기에 사로잡힌 독재자만은 아닌 것이다. 유대인이나 장애인들을 학살한 배경에는 견고한 논리가 있었다. 유대인과 장애인이 독일 사회를 좀먹거나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이유가 그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혼란 상황, 즉 패전국의 상처를 유대인에게 전가시킨 것과 상처 치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장애인의 학살이 과연 무관한 것일까?


그런데, 이런 혐오 감정의 종횡무진은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그것은 아마도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정이 붕괴 중인 상황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정이 흔들린 것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 후유증으로 인한 사회·문화적 긍지의 위기도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경제적 곤란은 개인의 심리적 불안으로 이어지고 심리적 불안은 사회적·문화적 긍지의 위기로 이어지는 건 굳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예에서 찾을 필요도 없다.


하지만 히틀러가 (물론 자기 불안도 있었지만) 그 불안과 긍지의 위기를 유대인과 볼셰비즘 탓으로 돌리는 것이 가능한 것을 봤을 때,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는 기초가 무너졌던 게 분명하다. 민주주의는 무엇보다도 정신적·문화적 건강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건강과 민주주의는 경제 상황이 곤궁해도 훼손되지만 지나치게 풍요로워도 문제가 된다.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돈이 당신에게 최대한 많아지는 일은, 그리고 명성과 명예는 돌보면서도 현명함과 진실은, 그리고 영혼이 최대한 훌륭해지게 하는 일은 돌보지도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게 수치스럽지 않습니까?”라고 아테네 시민들을 질타했을 때, 배심원으로 있던 아테네 시민들은 불쾌했을 것이다. 유죄의 이유로 소크라테스의 이런 ‘오만’도 적잖이 작용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아테네의 오만은 국가 폭력을 동반했다. 델로스섬에 있던 동맹의 금고를 아테네로 옮겨 전용했으며, 이에 불만을 품은 동맹을 침략하고 학살하고 민주주의를 강제로 이식시켰다. 정치적 우월의식과 경제적 풍요는 결국 ‘자기 자신을 아는’ 덕을 빼앗아갔고 소크라테스는 이를 비판하다 목숨을 잃었다.


바우만이 홀로코스트의 배경으로 짚은 ‘고도로 발전한’ 근대문명은 직접적인 살해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과 문화의 건강을 훼손하면서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그 폐허 위에 야만의 고속도로를 설계자의 이익에 맞게 건설함으로써 힘없는 목숨들을 희생시킨다. 혁명과 쿠데타의 역사를 온몸으로 다시 살며 내놓은 시인 김수영의 새로운 민주주의,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세계가 생각나는 요즘이다. 저 씨알들이 가진 것은 혐오도 정복도 아니고 주식과 펀드와 코인도 아니다. 새잎을 틔울 수밖에 없다는 경이와 설렘뿐이다. 그리고 경이와 설렘이 없는 민주주의는 위태롭다는 진실은 지난 역사가 입증해줬다.


황규관 시인

경향신문 2023년 10월 8일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10082026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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