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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수] 몰랐던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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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5-06-12 14:58 조회31,7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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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 이야기를 다루는 방송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편한 술자리 토크 형식이었는데, 여러 추억담이 쏟아져 나왔다. 부엌에 도시락이 죽 늘어서 있던 풍경, 2부제 수업, 산아제한과 관련된 삽화 등등. 정작 은퇴 이야기는 별로 나누지 못했던 것 같다. 사실 다들 별다른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을 테다.


베이비붐 세대는 산업화의 핵심적 시기를 거쳐왔다. 그런데 그날의 이야기에서도 나왔지만 그 세대의 가장 큰 그늘은 여성이었다. 그 시절 많은 여성들에게 대학 진학은 남자 형제들의 후순위이거나 봉쇄되어 있는 가능성이었다. 여공, 여차장, 여행원, 식모 등의 기이한 직업군 호명이 그 그늘을 적시한다. 내 초등학교 급우 중에는 ‘말(末)’자가 들어간 이름의 여학생도 꽤 있었다. 극단적인 남아선호는 그늘의 또 다른 풍경이기도 했다.


세상은 많이 바뀐 것도 같다.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남성을 앞섰으며 확대되고 있는 여성의 사회 진출을 두고는 ‘역차별’ 따위의 소리가 나온 지도 오래다. 무엇보다 가족의 형태나 결혼을 둘러싼 지각변동은 큰 규모로 진행 중이다. 나 같은 베이비붐 세대에게 알게 모르게 주입된 가부장제 기반의 중산층 핵가족 모델은 이제 해체되고 있다. 이 해체는 우리 세대가 내면화했던 성 역할이나 성 위계의 해체를 당연히 동반하고 있다.


그리고 나 자신 이런 세상의 흐름에 떠밀려오는 가운데 (우리 세대가 참여했던 민주화의 기억도 일부 가세하면서)적어도 남성 중심의 차별적 사회는 어느 만큼은 자동 교정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 게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나는 내 세대 여성들이 감수해야 했던 억압과 불평등을 ‘모르지는 않는다’는 정도에서 내 빚진 마음을 적당히 눅인 뒤, 적어도 성 평등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점진적인 진보와 개선이 당연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 일로 치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그 억압이나 불평등을 강요했던 자리에 구체적으로 나를 놓거나, 그 문제의 한쪽 당사자로서 내가 해야 하는 일 따위는 가급적 생각하길 피하면서 말이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와 관련하여 ‘맨스플레인’(‘man’과 ‘explain’을 합한 조어)이라는 말을 처음 접했을 때, 내가 심각한 느낌을 가지지 못했던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첫 반응은 아마도 이런 것이었을 테다. ‘나는 아닌데?’


그러나 문제는 개개 남자의 예의나 교양의 유무가 아니라(가까운 이는 ‘나’도 그렇다고 말했다), 오랜 남성중심사회가 구조화해 온 습속과 관성, 다른 성에 대한 태도의 차원이었다. 솔닛이 그 책에서 말하는 대로 모든 남자가 그런 결점을 가지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가끔은 여자들도 남자를 가르치려 들기도 할 테다.
(후략)


정홍수 문학평론가
(한국일보, 2015년 6월 8일)

기사 전문
http://www.hankookilbo.com/v/ac12f6dce567437280d14c046a2139d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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