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돈균] 다이어리- 반짝이는 건 도착 아닌 출발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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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5-01-05 16:51 조회27,88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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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칸이 나누어진 격자는 정확히 모든 공간을 서른 개 또는 서른한 개의 동일한 사각형으로 분할한다. 이 분할은 열두 달의 달력으로 포괄되면서 365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다. 이 도톰한 사물은 365개의 노트 뭉치이자 시간의 책이다.
다이어리라는 사물을 구입하게 될 때, 내부의 사각형 공란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기계적으로 분할되어 있다. 이 분할은 모든 이에게 똑같이 주어진 바둑판의 격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지 않은 바둑판에 세계가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아직 현실과의 교섭이 없는 이 사물의 표정은 무미건조하며 사무적이다.
하지만 이 격자판이 바둑판이나 노트의 공백과 같다고 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이미 ‘시간’이라는 세계 지평이 깔려 있다. 한 해의 마지막 즈음 자기 시간을 미리 당기고 싶고, 그 시간을 미리 보고 싶은 사람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내년의 다이어리를 구입한다. 그리고는 격자판 공란에 개인의 바람과 계획을 담아 당도하지 않은 한 해를 미리 채워 넣는다.
천편일률적인 시간의 격자판이 다른 빛깔과 두께로 달라지는 것도 이때부터다. 이 사물은 시간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려는 개인의 의지와 소망을 담은 노트다. 한 일을 적기도 하지만, 한 해·한 달·일주일 단위로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기입하는 것에 이 사물의 핵심이 있다. 저를 향해 당도하는 인생의 시간을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보다는, 제 자신이 시간의 조타수가 되어 원하는 삶의 뭍에 닿으려는 생활의 나침반이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매일경제, 2015년 1월 2일)
기사 전문 http://news.mk.co.kr/column/view.php?year=2015&no=4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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