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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마그나카르타 800년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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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5-02-13 14:53 조회29,6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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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나카르타 제정 800년이 되었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인권은 대헌장을 빼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영감의 원천이 되었으니 말이다. 권리와 정의는 양도, 거부, 또는 지연될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인권의 양도불가 원칙이 마련되었다.


인권이 진보한 것 같지만 권력의 지배욕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권력은 중력처럼 언제나, 영원히 인간을 억누른다. 한순간도 방심하지 말고 권력의 전횡을 감시하라는 명령이 마그나카르타의 진정한 교훈일 것이다.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가 제정된 지 800년이 되었다. 인권의 기원을 어디에서 잡느냐가 항상 논쟁거리이지만 적어도 근대적 의미에서의 인권은 대헌장을 빼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영감의 원천이 되었으니 말이다. 올해 영국에선 크라우드소싱으로 성문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학계와 시민들의 캠페인이 시작되었고, <비비시>(BBC)는 의회와 공동기획으로 민주주의 시리즈를 내보내고 있다.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영국의 조지 3세가 얼마나 식민지 주민들을 괴롭혔는지 그 죄상을 상세히 열거한다. 마그나카르타의 문제의식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1789년 프랑스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도 대헌장의 역사적 울림이 뚜렷이 남아 있다. 유엔이 그 정관을 ‘유엔헌장’이라고 부른 것도 마그나카르타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세계인권선언이 발표되었을 때 엘리너 루스벨트가 ‘인류의 대헌장’이라고 불렀던 건 유명한 일화다.


대헌장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1215년 6월15일 영국의 존 왕과 그의 신하인 영주들 수십명이 모였다. 왕과 신하들 사이에 흔치 않은 담판을 짓는 자리였다. 회동 장소는 런던에서 서쪽으로 약 80리 떨어진 서리주 근방 템스 강변의 초원. 이 부근 목초지의 지명이 러니미드. 사적지로 지정되어 현재 일반 대중이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아담한 기념관이 세워져 있는 이 조용하고 목가적인 풀밭에서 이토록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봉건시대엔 국토 전체가 국왕의 소유였다. ‘배런’이라 불리던 영주들은 자기 땅에선 작은 왕처럼 행세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 역시 국왕의 토지를 하사받아 사용하던 임차인이었다. 영주는 그 땅을 아랫사람들에게 다시 세주었으므로 봉건제는 여러 단계의 임대차 관계로 엮인 복잡한 먹이사슬 같은 제도였다. 영주는 두목 임차인이고 가장 낮은 단계의 농노는 졸병 임차인이었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물고 물리는 관계 속에서 서로 간에 권리와 의무가 정해져 있어 일종의 관습적 봉건질서가 확립되어 있었다.


그런데 옛 군주들이 흔히 그러했듯 존 왕은 고집불통에다 독선적인 인물이었다. 좌충우돌하면서 매사를 자기 마음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프랑스와 늘 싸웠고, 교황과 다투다 파문된 적도 있고, 전쟁에 드는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영주들을 엄청나게 쥐어짰다. 참다못한 영주들이 반란을 일으킬 지경에 이르렀다. 떼를 지어 몰려가 런던타워를 점거하고 국왕에게 관습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집단행동에 나섰다. 이에 존 왕이 마지못해 협상에 임했던 것이다.


몇가지 사실관계부터 정리하자. 1215년 6월15일에 존 왕이 합의문에 실제 서명한 것은 아니다. 존 왕이 글을 쓸 줄 알았는지조차 불분명하다. 며칠 동안 영주 쪽의 협박과 종용 끝에 국왕의 윤허가 6월15일에 떨어진 것에 불과하다. 겨우 분이 풀린 영주들이 국왕에게 충성 서약을 갱신한 뒤 필사 전문가들이 합의 내용을 라틴어로 양피지에 써서 양초로 봉인한 것이다.


1부만 작성된 것도 아니었다. 전국적으로 배포될 문서여서 수십부를 일일이 필사해서 했다. 따라서 이 사본들 모두가 ‘원본’에 해당된다. 현재 4부가 남아 있다. 양가죽을 석회수에 오래 담근 다음 꺼내어 팽팽하게 당긴 상태에서 말린 뒤 반달형 칼로 표면을 긁어내고 깃털 펜으로 글씨를 썼다. 양피지가 엄청나게 비쌌던 탓에 필경사들은 되도록 잔글씨로, 행을 띄우지 않고 빽빽하게, 그것도 약자를 많이 쓰면서 기록을 해야 했다. 1조니 2조니 하는 구분은 후대에 영어로 번역하면서 붙인 것이다.
(후략)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15년 2월 3일)

기사 전문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7663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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