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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수] 어른 되기의 힘겨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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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5-02-23 18:40 조회29,2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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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을 별 설렘 없이 맞게 된 건 이제 아이가 아니라는 우쭐한 자각을 마음 한쪽에 여투는 일이기도 했다. 화학섬유 냄새 물씬 나는 새 바지나 스웨터를 입고 설날 아침 동네 아이들과 은근히 겨뤄보는 일도 초등학교 몇 년이 지나자 조금은 시들해졌던 것 같다. 그런 일들이 왠지 유치하게 느껴질 무렵, 여드름이 나면서 괜히 목소리도 굵게 만들고 그랬을 테다. 왜 그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걸까. 그리고 정말 나는 이제 어른이 된 걸까.


얼마 전 트위터를 들여다보다 황현산 선생님이 올리신 글을 보고 아, 했던 기억이 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고 말한다면 선생께 무례를 범하는 일이 될까. 트위터라는 게 그때그때의 생각을 툭툭 말로 털어놓는 공간이라, 인용이 조심스러운 측면도 없지 않으나 나중에 단단히 야단맞을 각오를 하고 여기 옮겨본다.


“내가 살면서 제일 황당한 것은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을 가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결혼하고 직업을 갖고 애를 낳아 키우면서도 옛날 보았던 어른들처럼 우람하지도 단단하지도 못하고 늘 허약할 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늙어버렸다. 준비만 하다가.”


말의 제대로 된 의미에서 ‘어른’이 귀한 세상이라고들 하지만, 얼치기로나마 문학 동네를 기웃거리며 글공부를 하고 있는 내게 황현산 선생은 그저 우람한 산이다. 많지는 않지만 뵐 기회도 있었다. 글에서 배운 두텁고 깊은 지혜와 통찰, 기품이 그대로 당신의 모습이었다. 전혀 내세울 뜻이 없는 따뜻하고 겸손한 권위 앞에서 ‘어른’이라는 말이 절로 내 마음에서 솟았다. 선생이 내신 책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과 태도에서도 지금의 내 어설픈 느낌을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을 듯하다. 그런 터라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을 가진 적이 없다는’ 말이 충격이 아니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을 테다. 물론 찬찬히 새겨보면 삿되고 광포한 세상의 위세를 어쩌지 못하는 한 지성의 무력감의 토로로 읽을 수도 있다. 서생의 길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던 당신의 삶을 옛 어른들의 강건한 무실역행에 되비추는 겸손과 회한의 마음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내심 선생의 말을 있는 그대로 읽고 싶었고, 그렇게 위로받고 싶어 했던 것 같다.


황현산 선생의 너무도 솔직한 토로에 나의 불안과 허약을 기대겠다고 하면 언감생심일 테다. 다만 나 자신 생물학적 연령의 덧셈과 무관하게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시간이 밀어내는 대로 어, 어 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하는 게 가감 없는 진실일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무얼까. 교과서적으로 말한다면 입사과정(Initiation)을 먼저 치른 자로서 공동체에 대한 성숙한 책임과 윤리를 갖는 일, 무언가 들려줄 만한 생각과 말을 마련하는 일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게 전혀 없었다고 한다면 위악일 테지만, 실다운 느낌으로 나 자신의 깊은 곳에서 단단하게 여문 것들은 너무도 빈약했고 언제나 임시방편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니 언제나 손쉬운 합리화는 다음을, 내일을 기약하는 것이었을 테다. 사실 이제는 솔직해질 때도 되었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일 때도 되었지 싶다. 그런 내일은 없는 것 같다고 말이다.


선친은 조금 일찍 반백이 되셨는데, 지금 나는 그 설날 아침 무섭게 차례 길을 재촉하던 아버지의 나이를 지나고 있다. 선친 영향인지 나도 일찍 머리가 세기 시작해 지금은 거의 반백이다. 그때 아버지는 어떠셨을까. 당신의 세월로부터 세상을 버텨나갈 말과 걸음을 충분히 여투어두셨던 걸까. 우리 세대의 많은 이들이 그렇겠지만, 야단맞은 기억 말고 아버지와 나눈 대화는 별로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엄하기만 한 게 아니라 사랑도 많이 주셨던 듯한데, 그때는 잘 몰랐을 것이다. 아버지는 빨리 늙어가셨고, 그 불같이 호통 치는 모습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한국일보, 2015년 2월 17일)

기사 전문 http://www.hankookilbo.com/v/94918dee80854daab38e21b6d21211c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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