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갑우] 북한의 오래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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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5-03-09 12:36 조회29,131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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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4월9일 북한의 소설가 한설야(韓雪野)는 동료 두 명과 함께 프랑스 파리를 향해 출발했다. 한설야 일행은 소련의 연해주에서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이동하여 사증 발급과 기타 준비 관계로 며칠을 체류했다. 4월19일 모스크바를 떠나 여섯 시간 정도 지나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 도착했다. 프라하에서 프랑스 대사관에 들러 프랑스 입국을 문의하자 파리에 당신들의 대사관이 있느냐는 질문 등과 함께 입국 승인에 수일이 걸릴 수도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 4월22일 프랑스 정부로부터 입국허가를 받았고, 그날 오후 비행기로 파리에 도착했다. 14일이 걸린 여정이었다.
한설야 일행이 파리로 간 까닭은, 1949년 4월20일부터 개최된 평화옹호세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평화옹호세계대회는, 무당파적으로 변모했다는 해석도 있지만, 소련 및 동서 유럽의 지식인을 중심으로 미·소 대립이란 진영론에 기초하여 반전평화를 추구하는 평화운동이었다.
평화옹호세계대회의 의장이었던 핵물리학자로 노벨상 수상자였던 프레데릭 졸리오 퀴리의 보고 핵심은, 반전반핵과 군비축소였다. 4월25일 한설야는 북한 대표단 수석 자격으로 발표를 했다. 주요 내용은 평화옹호세계대회의 기조와 동일했지만, 한설야는 평화운동의 보편성 수용과 더불어 평화운동을 한반도적 맥락에서 통일운동으로 번역하고 있었다. 북한은 평화옹호세계대회 전인 1949년 3월 평화옹호전국연합대회와 1949년 6월 한설야 일행의 귀환보고에서도 평화담론과 한반도 특수적 통일담론을 결합했다.
북한판 평화담론에서 반핵은 1947년경부터 시작된 의제였다. 1949년 8월 소련이 핵실험을 하자 북한은 이 실험에 찬성했고 따라서 핵무기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금지를 목표로 한 국제적 평화운동에 참여했다. 1950년 3월 평화옹호세계대회 상설위원회가 핵무기의 무조건적 금지와 핵무기의 국제적 통제라는 간략하지만 대중적 설득력을 담지한 스톡홀름 호소문을 작성하고 서명운동을 전개하자, 북한은 국내의 각 지역에서 각계각층을 동원하는 군중대회를 통해 이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1950년대 초반은 북한이 한국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북한판 평화담론의 이중성과 근본적 결함을 생각하게 하는 두 계기다.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북한 정부는 빈과 베이징에서 개최된 평화옹호세계대회와 아시아·태평양지역 평화옹호대회에 한설야를 파견했다. 전쟁 기간 미국을 ‘승냥이’로 묘사했던 한설야는 이 대회들에서 평화에의 염원, 평화의 감정과 같은 수사를 사용하곤 했다.
(후략)
구갑우 북한대학원대 교수·정치학
(경향신문, 2015년 3월 8일)
기사 전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3082030395&code=99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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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석님의 댓글
유희석 작성일<P>구갑우 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한반도 분단의 현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 '역사'에서 배울 바가 여전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글이군요.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