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돈균] 담배 - 향유의 파라다이스와 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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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5-01-12 21:20 조회27,77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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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경험해 본 한국 남자들에게 이 사물의 기억은 애틋하다. 힘든 노동일을 하다가도, 험한 훈련을 받다가도 이 사물과 만나는 5분의 시간은 더없이 달콤하다. 이 사물은 앞뒤 시간의 맥락을 극단적으로 절단한다. 생활 속 시공간을 순간적으로 무중력화하는 이 작은 사물은 향유자를 그 자신 현재 인생의 시간으로부터 단절시키며,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주위로부터, ‘계급’이라는 사회 서열로부터 분리해 하나의 ‘동료애’로 묶는 기이한 능력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세상의 어느 학교에도 쉬는 시간 화장실에서, 학교 뒤편 야산에서, 후미진 골목길에서 이 사물을 입에 물고 있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역시 이 사물은 단절의 경험을 선사한다. 강력하고 집요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위반하는 아이들에게 이 사물은 그저 일상의 물건이 아니다. 아이들은 이 작은 사물을 통해 사회적으로 ‘합의된’ 금기를 위반하는 데 따르는 쾌락을 느끼며, 억압에 대한 반동 심리를 추동시킨다. 여기에는 육체의 실제 시간과는 무관하게 규정된 ‘학생’이라는 사회적 정체성이 ‘어른’이라는 시간대로 옮겨지는 심리적 동선이 내포되어 있다.
어린 시절, 이 사물을 물고 있는 여자를 보는 일은 낯선 일이었다. 길거리나 버스정류장에서는 특히 드물었다. 이 사물을 좋아하는 여자들이 있었지만, 익명의 군중 시선에 완전히 노출된 공공장소에서는 이 사물을 들고 있는 자신의 노출을 꺼렸다. 간혹 이 사물을 물고 버스정류장 앞에 남자들이 서 있고, 뒤편 후미진 곳에서 눈치를 보면서 이 사물을 물고 있는 여자의 풍경을 볼 때도 있었다. 대학이 이 사물을 애호하는 여자들에게 그때나 지금이나 ‘해방구’인 것은 마찬가지다. 그 학교에서 존경받았던 한 스승이 강의실에서 여학생들에게 이 사물을 건네며 향유를 공유하던 풍경은 지금도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후략)
함돈균 문학평론가
(매일경제, 2015년 1월 9일)
기사 전문 http://news.mk.co.kr/column/view.php?year=2015&no=28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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